이정혜, 주거연습 설치 전경, 2009. 사진: 김현호

언홈리, 홈, 김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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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홈리, 홈

모험을 끝낸 도로시는 “내 집 만한 곳은 없어”라고 말한다. 쉴 곳이 내 집뿐인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겠지만, 2020년의 집은 새삼 더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휴식의 장소일 뿐 아니라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피난처이고 때로 격리의 공간이 된다. 재택 근무와 온라인 교육으로 일터와 학교를 집이 대신하게 되었고, 야외나 체육관에서 하던 운동 대신에 홈트레이닝 영상을 보고 뻣뻣한 몸을 움직이며, 집에서도 자연을 느껴 보려고, 혹은 공기 정화에 도움이 될까 싶어 화분을 사들여 키우기도 한다. 정부가 지급한 재난지원금의 주요 소비 항목에 가구가 포함된다는 기사에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집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려는 공통된 의지가 읽힌다. 한편, 봉쇄 조치가 취해진 나라 곳곳에서 가정 폭력이 기존에 비해 급증했다는 통계도 눈에 띈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집에서 학대에 더 시달린 초등학생이 집을 탈출해 나와 도움을 요청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집이 모든 이에게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렇게 행동 반경이 집안 공간으로 좁혀지면서, 나날이 집의 의미와 효용, 집에서 일어나는 일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집과 바깥 공간 사이의 대비를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집에 대한 욕망을 키우기도 한다.

지나간 아트선재센터의 전시 중에서 특히 집을 주제로 했던 전시는 2009년 3월 7일부터 4월 26일까지 진행되었던 이정혜 작가의 개인전 주거 연습(House of Skins)이었다. 전시는 한국의 근대적 주거를 대변하는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 형식을 차용해, 세 가지 종류의 집의 모형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소개했다. 일반적 모델하우스가 근거하는, 마치 가족 형태의 기준처럼 등장하곤 하는 4인 가족에 부합하지 않는, 각자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제시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집의 형태를 구현했다.

먼저 3.5평형(11.64㎡) 모델하우스는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의 방 한 칸 크기의 집이다. 이곳은 스턴트맨을 포기하지 않은 서른 일곱 살의 남자와 유치원을 다니고 싶어하는 여섯 살 여자 아이를 위한 집이다. 간소한 살림살이와 편안히 누울 자리,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14.6평형(49.01㎡)에는 요가 수행자 여성 세 명과 고양이 아홉 마리, 앵무새 두 마리가 산다. 한 지붕 아래에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곳으로 나와 남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노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구획을 설정하거나 시선을 차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정혜, 주거연습 설치 전경, 2009. 사진: 김현호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0.9평형(3.14㎡)은 광장공포증을 가진 늙은 시인을 위한 집이다. 심리적인 이유로 혼자 자발적인 노숙자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적합한 공간이다. 이동시에는 트렁크에 넣거나 옷처럼 걸치고 다니다가 거리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립하여 세우면 집이 된다. 지붕 틈 사이로 잠망경을 올려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둥근 창에 깔때기를 끼우고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모델하우스는 아파트와 같은 대형 공동주택이 완공되기 전에 집의 내부 구조를 가늠해 보고 생활을 시뮬레이션해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런 모델하우스의 인테리어는 이상적인 삶의 이미지로 설정된 것을 학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비슷한 크기와 구조, 집기로 획일화된 공간은 생활의 견본이 되어 동일한 삶의 형태를 지시한다. 주거 연습은 아파트가 보편적 주거의 형태로 자리잡은 도시에서, 획일화된 삶에의 동경에서 벗어나 각각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이에 맞는 주거의 공간을 상상해 보기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 대량 생산된 사물과 공간이 삶을 얼마나 단조롭게 하는지에 대한 비평적 입장도 제시한다. 작가는 전시를 눈으로만 보는 대신 실제 사용과 쓰임새를 경험해 보는 공간으로 기능하도록 설계했다. 전시장 안에서 관객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앉고, 쉬고, 누워도 괜찮다고 하고, 관람객이 가져온 음식을 먹어도 괜찮다는 전시의 안내 지침은 일반적인 미술 전시의 운용방식과는 달리 쇼룸이나 모델하우스에서의 경험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각재와 반투명 소재로 집의 형태를 잡은 주거 연습의 구조물들은 역시 집을 모티브로 작업했던 서도호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서도호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한복을 만드는 천인 은조사를 집 형태로 재단해서 천장에서 매달아 늘어뜨리는 일련의 집 작업을 제작한다. 작가가 이주를 통해 겪은 지리적 환경 변화에 따른 공간의 재발견으로써 거주했던 공간들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특히 뉴욕에 있던 자신의 원룸 아파트를 재현한 완벽한 집 II(2003)은 변기와 세면대 같은 집기와 세밀한 틈과 문고리까지 재현하여 내밀한 개인의 공간과 기억으로 관람자를 초대한다. 같은 해 6월 서도호는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당시 서도호의 개인전은 뉴욕 전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의 작업들로, 집단 속의 개인, 집단과 개인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무수히 많은 개인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며 설치를 형성하는 큰 규모의 작업들이었다. 작은 인물상의 모형이 모여 도어 매트를 이루는 Doormat: Welcome(2000), 역시 인물의 군상이 깔린 바닥 위를 관객이 지나다니도록 만든 Floor(1997-2000) 수많은 군대 인식표로 구성된 텅빈 갑옷 SOME/ONE 등이 전시에 포함되었다.

서도호, Doormat: Welcome (Green), 2000, 아트선재센터 ⓒ 서도호
서도호, Floor, 1997-2000, 아트선재센터 ⓒ 서도호

작가는 이 개인전이 끝난 후 그 해 9월 연이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에서도 홍승혜, 양혜규 작가와 함께 파이널리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제작한 설치 Staircase II는 뉴욕에서의 작업과 더 가깝다. 스테인리스 틀에 반투명한 분홍색 패브릭을 덮어 만든 계단이 바닥으로부터 띄워 올려져 있고, 같은 재질로 된 천정과 연결되어 마치 전시 공간 속에 또 다른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도호, Staircase II, 2003, 아트선재센터

설립 초기부터 해외의 다양한 기관들과 협력하여 전시를 주최해왔던 아트선재센터가 개관 첫 해인 1998년에 개최한 국제 교류전의 제목이 바로 언홈리였다. 호주의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과 아트선재센터가 공동주최하고 제이슨 스미스(Jason Smith)가 기획한 이 전시는 아홉 명의 호주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일상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사이 중간에 존재하는 서식지”1 로서의 집을 조명한다. 홈(home)이나 가정적이라는 말은 친숙함과 편안함, 소박한 어떤 것을 연상시키지만, 전시에서는 소외와 밀실 공포 등 안정 아래 자리잡은 불안정의 상태를 함께 조망한다. 특히 현대 도시의 팽창과 고밀도 주택의 증가로 인한 문제, 사회 경제적 계급 차이의 척도로 드러난 집에 대한 인식을 지적한다. ‘언홈리(unhomely)’라는 용어는 참여 작가인 샐리 스마트(Sally Smart)의 기존 개인전이었던 The Unhomely Body에서 온 것으로 이는 다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운하임리히(Unhiemlich)”라는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평소 친숙한 사물이 갑자기 생소하고 소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돌변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고통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집의 양가적 상태를 지시한다. 여기서 집(house)은 가정(home)의 형태를 구축하는 신체로서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신체와 연결되고 다시 작품의 표피적 상태와도 연결된다. 앞서, 서도호의 집 연작이 심리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도 그 표면이 견고한 벽돌이 아니라 얇은 반투명의, 마치 피부와 같은 재질임에서 온다. 이정혜의 주거 연습 전시의 영문 제목인 House of Skins 역시 거주하는 이의 구체적인 체감의 상태가 집의 물리적인 표피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샐리 스마트는 몇 겹의 페인트나 벽지를 피부의 층으로 느꼈고 계단, 찬장, 문간 등을 집의 내장기관으로 보았으며, 거주하는 이의 신체 역시 하나의 가구처럼 집의 공간 안에 함몰되어 간다고 여겼다. 현대 사회의 신체와 그 재현을 바라보는 작가의 입장과 집을 몸으로 보는 감각이 그의 콜라주 작품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집의 형태를 구체적인 모형으로 제시하는 스테펜 버취(Stephen Birch)의 햇빛 속의 장소(A Place in the sun)(1997)는 교외의 집을 실패한 유토피아로 제시한다. 정원을 갖춘 주택이라는 집의 설정은 한국인에게 아파트가 의미하는 것처럼 안정의 상징이겠지만, 이 집은 그 이상이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정하면서도 어쩐지 스산한 형태의 집의 설치와 함께 죽은 나뭇가지들이 거의 비슷한 크기로 벽에 기대어 있다. 설치는 우울한 날씨의 긴 그림자처럼 껍데기로 놓인 집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 다양한 작업들을 통해, 전시는 호주의 현대미술작가들을 소개하는 교류전의 목적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가장 내밀하고 친숙한 공간인 집과 가정을 가장 불길하고 스산하고 낯설고 기괴한 장소로 탐색하는 보편적 설정으로 지역을 넘어서 공감을 획득한다.

스테펜 버취(Stephen Birch), 햇빛 속의 장소(A Place in the sun), 1997, 경주 선재미술관

시간을 건너 뛰어 최근 전시에서 집의 모습이 구현되었던 상황을 떠올려보자. 2019에 열렸던 구동희의 딜리버리가 만약 올해 열릴 전시였다면, 어쩌면 배달에 대해서 할 말은 더 복잡해졌을지 모른다. 불과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코로나19는 한국 물류 배송 시스템의 엄청난 효용과 그 이면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상세히 노출했고 집 중심의 생활 환경으로 일상은 더욱 배달의존적이 되었다. 딜리버리의 전시장 전체를 엮으며 진행되는 설치는 동선이 복잡하게 얽힌 롤러코스터 같은 배달의 이동 경로를 재현한다. 관객은 어떤 배달 과정의 배송자, 수신자의 상황을 교차 경험하면서 전시를 경험한다. 이 공간 속에는 배달의 종점인 집을 암시하는 지점이 등장한다. 2층 전시장의 곡면을 따라 서있는 네 개의 기둥 중 입구로부터 두 번 째의 기둥을 하나의 축으로 하여 상승했다 하강하고 다시 상승했다가 막다른 절벽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있다. 그 중 기둥 축에 가까운 계단 하나를 밟으면 붉은 경고등이 켜지면서 “부재시 문 앞에 놓아주세요”라는 음성이 나온다. 관객은 순간 배송물 또는 배송자의 입장이 되어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더이상의 진입을 차단하는 목소리와 함께 되돌아 내려간다.

구동희, 딜리버리 설치 전경, 2019. 사진: 김연제

처음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면, 이곳 아트선재센터의 건물이 서있는 장소도 사실 누군가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 있던 자리였다. 정원과 한옥, 증축된 양옥집이 연결되어 있는 이 거주 공간이 미술관 건물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기 전이었던 1995년, 빈집의 상태에서 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열렸다. 전시는 이후 세워지게 될 미술관의 ‘싹’을 틔우면서 기존의 터전에 인사를 고하는 전시가 되었다. 일본식 구조가 섞인 개량식 한옥에다 서양식 건물이 증축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존의 집을 모티브로, 기획자인 김선정과 열 일곱 명의 참여작가들은 한국과 일본, 서양이 뒤섞인 현대 사회의 모습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특정 장소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의 환영을 보여준다. 작가들은 사랑방과 부엌 등 공간의 용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을 전개하기도 하고,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다수 사용하여 작업을 만들기도 했다. 최정화 작가가 디자인한 전의 도록 표지는 공성훈 작가의 작업 개방 국수(1995)의 이미지로 눈길을 끈다. 지금의 관객들은 회화 작업에 더 익숙하겠지만, 90년대 한창 위트있는 설치 작업을 전개했던 공성훈 작가는 이 작업을 만들 때, 실제 개집 안에 모형으로 된 국수를 넣어 정원에 설치했다. 개방(開放)과 국수(國粹)라는 한자의 동음이의어를 이용하여 제목과 형태를 연결하여 개방을 표방하면서 국수주의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에 대한 시니컬한 표현을 강화했다.

한 나라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역사책의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2020년이라는 SF스러운 숫자 아래, 나라간 이동이 제한되고 국경이 거의 닫힌 채로 벌써 몇 개월이 흘러갔다. 그 사이 지역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가까운 곳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해외를 방문하여 낯선 지형과 문화를 경험하면서 감각을 다시 깨웠던 시간들이 무척 그립기도 하다. 고립이 장기화되면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지게 될까. 혹은 더욱 더 과거의 경험을 되찾길 원하게 될까. 현재의 전세계적 위기의 상황이 언젠가 마무리됐을 때,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으로 했던 상황의 부작용으로 국가주의나 국수주의의 태도들을 마주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20년 우리의 집—나의 정신이 머무는 신체, 그 신체가 거주하는 장소, 국가, 이 세계—모두 언홈리이다.

공성훈, 개방국수, 1995, 아트선재센터

김해주

전시기획자. 현재 아트선재센터 부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정혜: 주거 연습 개인전 리플렛(2009),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2003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전시 도록, 서울: 아트선재센터 발행
언홈리 전시 도록(1998), 아트선재센터 발행


  1. 제이슨 스미스, 『언홈리』, 아트선재센터, 경주선재미술관, 아시아링크 센터,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공동 출판, 1998, 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