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츠오 미야지마, 떠도는 시간(1999), 타츠오 미야지마: 카운트 오브 라이프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02.

감각을 익히는 장소, 정유진

열람 시간: 19분

감각을 익히는 장소

  1.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나요?
    효과라는 말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거요.

교육 프로그램 개요에 대해 듣고 있던 타 기관 담당자가 물었다. 미술관을 방문한 어린이들이 전시와 연계된 여러 활동에 참여하여 그리기나 만들기, 토론, 게임 등을 함께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한 직후였다. 이어서 그는 본인이 미술 쪽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적합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는 점을 부연했다.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아무도 내게 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그것을 명시해달라고 직설적으로 질문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묻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나 글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질문을 받은 당시 해당 프로그램을 만들며 염두에 두었던 점을 토대로 답변을 했지만, 그 답이 충분했는지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그 질문은 매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끝마칠 때마다 팝업창처럼 자꾸만 다시 떠올랐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참여자들은 과연 무엇을 느끼고 돌아갈까?’ ‘이 프로그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등으로 질문의 형태가 그때 그때 수정되면서.

최근 몇 달 간은 그 질문이 다른 고민으로 이어졌다.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의 참여로 인한 감염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작품을 감상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들이 물리적 공간이 제공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구현 가능한지, 교육 프로그램이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관객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 향후에도 지속된다면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 당장에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질문을 가득 안고,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상자들을 하나씩 열었다. 아트선재센터 지하 창고에는 정리되지 않은 자료 박스가 여럿 있었다. 당장에 어떤 프로그램들을 무리하게 진행하는 대신, 기존 자료들을 정리하며 교육 프로그램의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미술관을 방문하지 못하는 지금, 지난 20년간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되었던 여러 교육 프로그램 자료들을 정리하며 그때의 답변을 조금 더 구체화 해보기로 했다.


  1. 동시대 미술 작품을 다루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던 1999년 어린이 워크숍에서 출발하여 2000년 미술관은 놀이터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1 같은 제목의 프로그램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초기 미술관은 놀이터는 아티스트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어 김범, 오인환, 이주요, 정서영, 정연두, 최우람 등을 포함하여 다수의 작가들이 참여하였다.2

프로그램의 내용은 감상 활동과 창작 활동,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어린이들이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를 자신들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게끔 제시된 질문지가 보관되어 있어 이를 소개한다. 작품은 타츠오 미야지마의 카운트 오브 라이프(2002. 9. 7 – 11. 10)에 설치되었던 떠도는 시간(1999)이다.

타츠오 미야지마, 떠도는 시간(1999), 타츠오 미야지마: 카운트 오브 라이프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02.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볼 때나 친구들과 신나게 놀 때와
엄마에게 꾸중을 들어 벌을 설 때나 지루하게 친구를 기다릴 때,
어느 때가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나요?

떠도는 시간은 이렇듯 순간순간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을
컴퓨터를 이용해 떠돌아다니는 숫자로 표현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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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몰두할 때의 시간과 어떤 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다르게 체감된다. 하염없이 연장되는 이 시기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몸의 감각을 느리게 만들지만, 때로는 어디에나 존재 가능한 바이러스의 공포를 잊기 위해 빠르게 흘러가는 이미지들에 시선을 맡기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떠도는 시간이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된 지 18년이 지난 지금, 2020년의 어린이들은 올해의 시간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학교에 가지 못하는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며 느리고 지루하게 떠있는 숫자들로 지금을 기억하게 될까. 혹은 그때 그 시절의 ‘만화 영화’ 보다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늘어나서 이런 것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던 신나는 순간들도 있었을까.


  1. 어린이들에게 미술관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가득한 공간일 것이다. 가정이나 학교 등 일정한 생활 반경을 오가며 늘 보아오던 풍경과 사뭇 다른 공간 속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치 작업, 신기한 형태의 조각들, 심지어는 작품을 고정하기 위해 설치된―어른의 시각에서 지나치기 쉬운―보조 장치들까지.

다소 상기된 상태로 전시 공간에 들어선 어린이의 입장에서 눈 앞의 사물들에 손을 갖다 대고 싶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자주 보던 물건은 친숙해서 만지기에 어렵지 않고, 처음 보는 것은 궁금하니까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알록달록한 것은 색깔이 그 이유가 되고, 촉감이 특이할 것 같은 사물들은 그 나름대로 만져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리고 대체로 어린이들의 손은 스스로 이런 마음을 인지하기도 전에, 눈보다 빨리 그 사물에 닿는다.

이를 발견한 에듀케이터의 입장은 다소 난처하다. 엄한 표정을 지어가며 작품을 만지면 안된다는 규칙을 이야기하고 재차 약속과 다짐을 받아내지만, 이내 곧 홀리듯 작품에 눈과 손을 빼앗긴 호기심 가득한 얼굴들을 보면 웃음이 터지고 만다.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한다. 어린이들에겐 놀이터겠지만, 나에게 이곳은 일터니까.

비요른 브라운, 무제(제브라 핀치 둥지)(2012-2013), 색맹의 섬 설치 전경, 아트선재센터, 2019.
미술관은 놀이터 진행 시 ‘눈과 마음으로 감상해요’ 규칙을 지키기가 역대급으로 어려웠던 작품.

그렇다.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이들과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자 하는 미술관 교육 담당자에게는 많은 것들이 열려 있으나, 한가지는 대체로 허락되지 않는다. 바로 작품을 ‘만지는’ 행위이다. 콘텐츠 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를 포용하지만 물리적으로는 강력한 통제가 작동하는 곳. 동시대 작업을 다루는 미술관의 이 두 가지 특성을 오가며 어린이들은 규칙을 지켜야 할 때와 자율성을 발휘할 때의 감각을 익혀가는 것은 아닐까.


  1.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운영했던 어린이 프로그램 BTA(Brainchildren Through Art)와 Pre-BTA는 개관 초기와 달리 어린이 프로그램이 대중화된 시점에서 타 기관과 차별점을 두기 위해 기획된 심화 프로그램이다. 미술을 매체로 어린이들의 논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데 포커스를 맞추었던 이 프로그램은 자료가 꼼꼼히 정리되어 있어 6년간 어린이들이 규칙과 자율성을 비롯한 다양한 감각들을 키워간 흔적을 지금도 엿볼 수 있다.

기록물을 검토하며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매 회차 프로그램에서 가장 먼저 진행했던 전시 감상 교육이다.

이와 같이 분홍색 종이 리플렛을 준비했던 회차가 있는가 하면, 전시장 입구에 서서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진 어린이들을 앞에 두고 선생님들이 미리 준비해온 짧은 인형극을 펼친 내용도 있다. 스크립트와 함께 ‘전시장 에티켓 손가락 인형극’이라는 표기를 보니 작은 인형을 손가락에 끼워서 열연을 펼치는 선생님 두 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안녕하세요!
[인사성이 밝은 똘이는 약속도 잘 지킨다고 하던데…]
네~ 그럼요~ 똘이는 약속을 참 잘 지켜요~
[지금 친구들과 함께 작품을 볼텐데 이 곳에서 꼭 지켜야할 약속이 있어요. 무엇이 있을까?
음, 똘이가 한 번 말해볼까요?]
소곤소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크게 소리 내거나 떠들지 않고, 소곤소곤 말해요.
그리고 시끄럽게 뛰어다니지 않아요.
[그래요. 작품 중에는 소리가 나는 것도 있어요. 소리를 어디로 들어야 할까?
눈으로? 손으로? 엉덩이로?]
에이, 선생님도 참~ 귀로 들어야지요~
[맞아요. 귀로 들어야 하니까, 친구들 모두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로 해요.
큰소리를 내면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가 되겠죠?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먹을 것을 들고 가지 않아요.
[와~ 똘이 친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네요.
그래요.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가면 작품에 묻히거나 바닥에 흘리는 경우가 생기죠?
만약 흘린 음식을 누군가 밟기라도 한다면?]
미끄러져서 다쳐요~ 으~
[그래요. 미술관에 들어갈 때는 음식을 가지고 가면 안되겠죠?]
네~
[또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분들 중에 또 아는 친구 있나요?]
저요! 저요!
[네, 똘이가 말해볼까요?]
작품이 신기하고 좋다고 만지지 않아요.
[음, 왜요?]
작품을 만지게 되면 망가져서 다른 친구들은 볼 수가 없어요.
[맞아요. 그리고 만지다가 다칠 수도 있어요. 똘이는 미술관에서 지켜야 할 약속들을 잘 알고 있네요. 모두 잘 지킬 수 있죠?]
네, 약속들 꼭 지키면서 작품을 볼 거예요.
[우와~ 그래요. 여러분 똘이 친구와 함께 한 세 가지 약속 잊지 않았죠? 준비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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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극을 보고 전시장으로 들어간 어린이들은 혹시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실수로 작품을 망가트려 다른 친구가 작품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형들과 한 약속을 잘 지켰을까.

이후에도 BTA 프로그램은 참여한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규칙을 제시한다. 어느 날은 사건 현장에 파견된 어린이 탐정이 되어 작품에 손을 대지 않고 ‘탐정 수첩’을 작성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날은 관람 규칙을 잘 지킨 어린이들에게 그림 카드를 선물했다. 스티커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전시를 놀이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눈 모양 스티커를 나눠주어 신체에 제 3의 눈을 부착하게 하고, 세 개의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자는 약속과 함께 관람을 시작했던 날도 있었다.

감상 규칙을 제시할 때는 예외가 없었지만, 감상 후 액티비티를 진행할 때에는 정답이 없었다. BTA는 다양한 질문지를 통해 어린이들이 사고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자유로운 답변들을 기반으로 창작 활동까지 이어서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5

질문지는 어린이들이 고민을 토로하게도 하고,

가상 상황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기도 하고,

어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게 돕기도 했다.

질문과 토론이 진행된 후 이어진 창작 활동 결과물은 어린이들이 집으로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무엇을 어떤 형태로 만들거나 그렸는지 생생하게 그려보기는 다소 어려웠지만, 여러 질문을 통해 이끌어낸 다양한 생각이 담긴 창작 활동이 어린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던 점은 학부모님께 전달된 이메일 사본을 통해 전해졌다.

간혹 아이들 작품을 보시고, “넌 왜 이것밖에 못했니?” “이게 다 한거니?” 등의 이야기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요, 결과보다는 어떤 과정과 상상을 통해 제작되었는지 물어봐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아이의 어떤 경험(여행, 독서, 친구 및 가족 관계 등)이 작품에 녹아 있는지 자세히 봐주세요. 작품이 다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에 대한 기준은 아이들이 정하는 것이지 부모님께서 정해주시는것이 아니랍니다.


  1. 작년 미술관은 놀이터 프로그램에 친구와 함께 참가했던 한 어린이가 있었다. 팀을 짜는 시간이 되자, 그 어린이는 함께 온 친구와 같은 팀이 되고 싶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어디 놀이터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 놀이에도 규칙이 있다. 좋든 싫든 규칙은 모두에게 적용되며, 함께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모두가 조금씩은 양보하고 배려하며 이를 지켜야만 한다. 이런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혔던 것일까. ‘오늘은 제비 뽑기로 팀을 정할 거예요.’라는 말에 어린이는 더 이상 떼쓰지 않았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규칙을 어기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 어린이도 알았을 것이다.

프로그램 매 회차의 시작마다 진행한 관람 예절 교육에 따라 전시장이 특정 규칙을 지켜야하는 공간이 되었듯이, 새로운 감염병이 확산되고 있는 사회에도 새로운 룰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떤 감각은 무뎌졌을 때 타인에게 위협이 되며, 때때로 그것은 혐오의 토대가 된다. 감각을 익히고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며 공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어린이들은―간혹 집중력이 본인들도 모르게 흐려지긴 하지만 대체로 어른들이 제시한―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질병관리본부가 진행한 어린이 브리핑에서 지금과 같은 시기에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해도 괜찮을지 전문가에게 질문했던 어린이는 아마 올해 생일 파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마스크를 하지 않은 채 파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클럽이나 룸살롱 같은 장소에서. 생일도 아니면서.

미술관의 문을 놀이터로 열기가 조심스러운 지금, 노는 것을 좋아하고, 열심히 놀아야 하며, 놀 때 제일 행복한 어린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술관에서 펼쳐진 여러 형태의 놀이를 통해 규칙을 익히고, 새로운 생각들을 펼쳐 나갈 수 있는 시간이 곧 오기를. 어린이들에게 그때가 너무 멀지 않기를 바란다.


정유진

미술이론을 공부했으며 공적 영역에서 시각예술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아트선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1. 최윤아(現넥슨컴퓨터박물관장, 前아트선재교육팀장) 인터뷰, 2020. 6. 9. 오전11시 (45분) 

  2. 최윤아, 「아트선재센터 교육 프로그램, 전시의 영감을 일상으로」, 『커넥트: 아트선재센터 1995-2016』, 서울: 아트선재센터, 2018. 

  3. 미술관은 놀이터 자료집, 서울: 아트선재센터, 2002. 

  4. Pre-BTA 자료집, 서울: 아트선재센터, 2009. 

  5. BTA 자료집, 서울: 아트선재센터,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