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앙 프레비유, 핀치-투-줌 설치 전경, 2018. 사진: 김연제

『핀치-투-줌』(2018), pp.108–119, 서동진

열람 시간: 26분

노동의 줌-인


줄리앙 프레비유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궁극의 핀치-투-줌)(2018)은 타공판 위에 설치된 물리치료기계에 연결된 손을 보여준다. 타공판의 지지대에 장착된 고리와 끈은 ‘핀치-투-줌(pinch-to-zoom)’ 동작을 완강히 제약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는 구속에 저항하며 그 동작을 실행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꼬집어 확대해 보기란 동작을 가리키는 ‘핀치투줌’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관습적 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고 조작을 수행할 필요를 절약하며 그 모두를 우아한 동작 하나에 집적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해당 영역을 설정하고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의 복잡한 정보처리와 명령을 행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두 손가락을 모았다 벌린다.

이는 ‘엄지-척(thumbs up)’ 같은 동작과는 다를 것이다. 그 동작은 격려와 위무, 칭찬과 지지라는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기예이다. 그것은 기분에 좌우된다. 그때그때의 의지에 따라 발휘되는 만큼 그것은 자의적인 몸짓이다. 이는 빙그레 미소 띤 얼굴과 짝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고 어깨 위로 솟아오르는 기운찬 몸짓으로 접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핀치-투-줌’은 제법 정확한 범위에서 제법 알맞은 속도로 모두에게 똑같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 동작은 이제 확대 조작을 위한 모션의 프로토콜로 존속될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하나하나의 동작을 글로벌화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자면, 섬뜩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굳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줄리앙 프레비유가 아마 모르지 않았을 위의 장치 혹은 기록계는 이태리의 생리학자 안젤로 모쏘(Angelo Mosso)가 고안한 에르고그래프(Ergograph)이다. 에르고그래프란 문자 그대로 ‘일 기록계(work recorder)’란 뜻이다(ergograph에서 erg는 작은 단위의 일을 가리키고 graph는 쓰기writing를 가리키는 희랍어이다). 이 장치는 근육활동의 최적 상태를 측정할 목적으로 발명되었다. 혹은 거꾸로 근육활동의 엔트로피라고 할 수 있을 피로(fatigue)를 측정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기도 하다. 프레비유가 우의(寓意)적인 ‘궁극의 핀치투줌’ 기계를 제시할 때, 그는 핀치투줌의 고고학적인 기원을 넌지시 언급하는 셈이기도 하다. 둘은 놀랍도록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핀치투줌을 노동을 가시화한다고 믿는 시각적 장치의 기원 속으로 운반한다. 그 시각화 장치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현실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실재인 노동(마르크스라면 이를 ‘유령적 대상성’이라고 부를 것이다)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는 노동이라는 ‘운동’을 마법처럼 이미지화한다.

현실에서 노동이라는 독특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계를 오르거나 망치를 내리치거나 빵을 굽거나 선반에 물건을 올리는 무한히 다양한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 자신의 말을 빌자면 이는 구체적 노동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역사적으로 특유한 노동을 착취한다.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이는 추상적 노동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바로 이 노동의 이중성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이중성을 발견한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치적이라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자본』에서 우쭐해하기도 했다. 모쏘는 마르크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다. 그는 마르크스가 발견한 추상적 노동에 추상적인 궤적의 이미지를 덧붙인다. 그러나 둘이 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한 명은 노동해방을 소망했다면 한명은 최적의 노동을 찾고자 했다.


줄리앙 프레비유는 노동의 고고학자는 아니다. 차라리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찾자면 그는 노동의 고현학(modernology, 考現學)적 조사원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오늘의 노동의 면모를 추적하는 현장, 즉 포스트-테일러주의적 체제에는 위대한 이름과 공장, 기계가 없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20세기 자본주의 황금기를 열었던 포드주의(Fordism)는 포드 자동차 공장과 일관생산공정의 컨베이어벨트라는 모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가 있었다. 그는 ‘시간-동작 연구(time-motion studies)’를 통해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최적의 동작을 찾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그 최선의 동작을 터득하고 훈련해야 했다. 관리자들은 이 최적의 동작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생산 과정에 규칙과 규율을 부과하고 감시해야 했다. 푸코가 말한 규율(discipline) 권력의 행사 방식은 능률(effectivity)과 효율(efficiency)을 제고하는 경영(management)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생산적인 신체(productive body)’를 좇는 권력이 상대했던 신체란 무엇일까.

프레비유는 그런 동작들을 고안하고 정립하며 통제하는 몇몇의 현장을 폭로하며 그 동작을 담지하는 신체를 수집하고 보고한다. 노동이 물리적인 대상을 제조하는 노동이 아니라 상징적인 정보를 처리하는 동작들로 변모할 때, 노동 역시 상징화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노동의 상징화는 또한 그 동작의 안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작 가운데 가장 큰 추문을 불러일으킨 것 가운데 하나가 “밀어서 잠금 해제”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것은 기기를 작동하기 위해 수행하는 움직임을 상징화한다, 즉 안무한다.(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시퀀스 #2), 2014) 그리고 그렇게 상징화된 동작은 잠재적인 동작들의 창고 속에서 수집되고 독점되며 가치화되어야 한다. 프레비유가 “미래 제스처의 아카이브”로 표현하는 이 특허 등록된 동작들은 뛰어오르고, 여닫고, 구르고, 비키는 일련의 동작들의 비지표적인 상징으로서 상품이 되어왔다.(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시퀀스 #1), 2007-2011)

이는 어쩔 수 없이 모던 댄스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독일의 안무가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라반 운동(Laban movement)’이라고도 알려진 그의 키네토그라피는 ‘8가지의 기본 움직임(the eight efforts)’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적인 운동들을 결합하는 안무는 곧 누르고 휘젓고 튕기고 비틀고 찌르는 등의 동작들을 조합하고 배치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오늘날 우리가 수행하는 노동의 키네토그라피로 가치전환(transvaluation)한다. 이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창립자인 라반은 나치 독일로부터 망명한 영국에서 산업노동의 표준을 설계하는데 앞장섰던 바 있기 때문이다.


앤슨 라빈바하(Anson Rabinbach)는 『인간 동력기 Human Motor』(1992)란 기념비적 저서에서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노동의 역사적 특성을 분석한다. 그를 위해 그는 노동을 둘러싸고 순환하였던 역사적인 관념을 ‘초월적 유물론(transcendental materialism)’이라 명명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의 역사적인 비밀을 푼다. 초월적 유물론? 이는 모순어법처럼 들린다. 초월적인 것과 유물론이란 것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월적 유물론은 성립한다. 19세기 후반 과학자들은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물질적인 활동이라 할 노동을 가로지르고 정초하는 그것은 바로 힘(力), 에너지(energy), 크라프트(Kraft)라는 점을 보고했다. 열역학법칙의 발견은 모든 운동이 힘의 실현이자 전개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기계의 운동이나 사람의 동작이나 다를 게 없다. 그들은 모두 운동이란 점에서 같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이 에너지의 소비란 점에 있다. 에너지의 소모가 노동이라면 식사와 휴식을 비롯한 일들은 에너지의 비축이거나 이완이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에너지의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노동이든 기계의 작동이든 모든 운동은 초월적인 실재인 에너지를 통해 완벽하게 설명된다. 증기기관이 에너지를 운동으로 전환하듯이 인간도 칼로리를 운동으로 전환한다. 기계의 역학적 운동에 의해 에너지의 엔트로피 상태가 초래되듯이 인간의 운동은 피로와 소진이라는 엔트로피 상태를 맞이한다. 결국 에너지를 운동-노동으로 전환(conversion)하는 장치가 동력기(motor)라면 인간의 신체 역시 동력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물음에 맞닥뜨린다. 여전히 우리의 생산하는 신체를 동력기처럼 바라볼 수 있을까. 프레비유는 아마 그에 이견을 제기할 것이다. 산업노동의 시대에 생산적인 신체에 가장 큰 골치가 피로였다면 그것의 해결책은 ‘자양강장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생산적인 신체에게 가장 큰 위협은 극도의 산만함(distraction)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효과적인 처방은 ‘레드 불스(Red bulls)’와 같은 고카페인 음료일 것이다. 아니면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업계에 첫 발을 내딛은 주인공 조단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근 첫 날, 이 업계에서 일하려면 필수적 식사라면서 상사로부터 접대 받는 마티니 잔 가득 담긴 알약들일지도 모른다. 주의력결핍행동장애(ADHD)를 치료할 목적으로 처방되는 약의 적은 주의산만이다. 극도의 주의집중을 동원해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 금융 애널리스트가 굳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끝없이 인터페이스와 디스플레이 장치를 흘깃대며 노동을 한다. 이러한 감각적 지각의 과부하 속에서 우리는 극도로 산만하고 어수선하다. 인터페이스를 보고 반응하는 것이 일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위기에 처한다. 히토 슈타이얼이 신랄하게 비꼬는 것처럼, 오늘날 이미지를 경험하는 활동은 “압축된 주목 시간, 몰입보다는 인상, 관조보다는 강렬함, 상영보다는 시사회에 집착하는 정보 자본주의에 온전히 통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그리고 그럴수록 이러한 시각적 지각을 비롯한 감각적인 경험들은 더욱 세밀하게 조사, 측정, 관리되어야 한다. 안구 운동을 추적하는 시각스캐너의 작업을 시각화하는 프레비유의 작업인 시선의 문집, 2015-2018은 그것을 들춰낸다. 이는 무한히 퇴화하고 탈선하는 감각적 활동의 엔트로피를 저지하려 분투하는 자본의 대응을 상기시킨다.


‘주목 경제(economy of attention)’는 오늘날 경제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갖는 것은 주목이라고 일갈한다. 그 탓에 이미지는 더 큰 주목을 쟁취하고자 더 큰 충격을 낳는데 전력한다. 시선을 낚아채는 미끼가 없다면 어느 것도 소비될 수 없고 반응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 갖는 능력을 마모시키고 파괴한다. 조너선 크래리가 『24/7-잠의 종말』에서 음울하게 토로하듯이, 오늘과 다른 어떤 미래를 희미하게라도 예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감각, 즉 ‘집단적으로 공유된 장기간의 감각’은 단말마적인 찰나의 감각의 연쇄로 인해 파괴된다.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많은 활동, 심지어 놀이와도 같은 활동조차 노동으로 흡수하고 착취하는 세계(구성된 변칙, 2011)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프레비유는 해법이 없지 않다. 그는 착취의 대상이 되어버린 동작들을 심미적인 동작으로 번안함으로써 그것에 응수하거나(삶의 패턴, 2015), 자동화된 시각적 처리를 되먹임 하는 미적인 행위로 변조하거나(드로잉 워크숍-파리14구 경찰서, 2011, 2015), 아니면 일상적인 활동을 가치를 낳는 생산적 노동으로 착취하는 전능한 시각 기관(organ)의 눈길을 맞받아친다(오늘은 위대하다, 2014). 이러한 ‘미적 저항(aesthetic resistance)’이 얼마나 효과적일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을 안무로 치환하고, 감시적 작도를 성찰적인 드로잉으로 전환하며, 그의 훔쳐보기를 나의 훔쳐보기로 대치시키는 것이 비판이라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물론 그렇다, 이다. 프레비유의 작업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비판적 실천으로서의 미적 실천이란 관념이 아직도 유지될 수도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오늘의 경험을 기록하는데 급급한 동시대 미술의 참담한 현황에 한숨을 내쉬다, 프레비유같은 작가와 대면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동진

문화 연구 겸 사회학 분야의 비평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이다.


  1. H.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