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찬숙, <양지리 아카이브>, 2016, 피그먼트 프린트, 각 15 x 20cm, 사진 : 작가 제공

『Re-move』(2018), pp.17–24, 라베아 루겐슈타인

열람 시간: 19분

서사 | 공간 | 정체성

“나도, 당신도, 더 이상 전통과 역사와 미래의
사슬의 연결고리가 아니다... 난 더 이상 시간도,
소득도 없으며, 당신은 얼룩이자, 한 순간이자,
어떤 일시적인 것이자, 상징이자, 점이다.”

— 미미카 크라나키, 마크 테르케시디스의 책 『Kollaboration』(2015)에서

  자의든 타의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이든, 이주(移住)는 우리의 공존에 영향을 미치며 항상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로 이어져왔다. 이주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경계선을 긋고 사회적 협의 절차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등의 변화를 공동체에 가져다 준다.
  문화는 획일적이지 않고 유연하다. 여러 문화가 만나게 되면 역동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이러한 문화의 접점에서 문화가 변할 수 있는 ‘제3의 공간’(Bhabha: 1990)이 생성된다. 제3의 공간은 문화적 차이가 가능해지고 불평등에 대한 협의가 진행될 수 있는 전환의 증거이다.1
  변화의 역동성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직면하고 사회에서의 위치를 다시 고민해볼 수밖에 없게 되는 과정으로 이끈다. 본인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그와 연관된 모든 요소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되면 동시에 불확실성을 초래할 수도 있다.
  20세기 중반에 그리스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작가 미미카 크라나키(Mimika Cranaki)의 자화상은 뿌리가 뽑힌 느낌과 전통으로부터 분리된 개념,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이야기로부터 소외된 느낌 등을 묘사한다.
 저자 마크 테르케시디스(Mark Terkessidis)의 생각에 따르면 크라나키의 경험은 “역사-시간적 지속성”을 상실하는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Terkessidis: 2015) 이는 이주를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2
  따라서 이주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여러 문화가 만날 때 유익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결과와 동시에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하는 개인적인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발생시킨다.
  이에 따라 “자의적 혹은 타의적 과도기에 어떻게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해야만 하는가?”라는 핵심적인 의문이 도출된다. “시공간 편성”을 (Terekessidis: 2015) 복원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공통된 행위로 새로운 무형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개인의 추억에 기반하며 시간과 공간이 서로 겹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단편적인 “상상적
 영역” (Terekessidis: 2015)이 생성된다.
  서구의 서사 심리학의 핵심 주제는 시작과 중간 (정점과 최저점을 포함) 그리고 끝이 포함되어 일관성 있는 전기(傳記) 이야기로 구성된다.3 심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질서정연한 전기는 한 개인의 삶에 일관성을 
가져다 주며, 그 인생이 조화롭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개인의 단편적인 경험과 인생 사건을 하나의 이해 가능한 과정으로 통합해준다. 이처럼 여러 경험을 질서 있는 이야기로 통합하면 각 사건을 각색할 수 있고,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위기의 순간이나 인생의 혼란기가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서구의 사회적 비평에서는 이주민 출신뿐만 아니라 최종 목적지에 거주 중인 사람들도 뿌리가 뽑혔다고 인식한다.4 현대 서구권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노동 환경과 생활방식의 유연성은 상당히 큰 비율의 인구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 시장의 재편성은 다수의 노동자가 프로젝트 단위의 계약직이나 임시 비정규직으로 일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며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유동적인 인생 계획에 대비해 항시 예의주시하게 된다. 동시에 고정직이나 평생직업과 연관된 사회보장 여건 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재편성 과정은 직업과 연관된 정체성을 해체시키며 새로운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선형적이고 전문적인 정체성을 잃게 된 개인은 이해할 수 있는 인생사를 지속적으로 다시 구상해야 한다. 더불어 유연성의 패러다임은 더 넓은 분야에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1950년대의 사회적 이상과, 핵가족의 통합, 고정된 역할 모델 등을 이 유연성 패러다임이 대체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정체성의 명확한 근거로 삼을 수 있던 문화적, 사회적 가치관은 영향력을 상실했다. 보다 더 거시적이거나 메타적인 서사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다고 느낀 개인은 자신의 인생사가 단편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지속적으로 위기에 빠지는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발전의 흔한 증상이다.
  더불어 개인은 여러 면에서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게 되며 인생사를 영구적으로 구축하거나 재편하여 매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체성의 구조를 변경하고 개발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지만 동시에 불확실성도 발생한다.
  한편 이러한 정체성의 변혁 과정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가시화할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대화의 수단이 개설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 협의하고 새로운 특징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통신 기술은 국경을 넘어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더 가깝게 모아주며 유연한 생활방식과 노동 환경을 촉진한다.
  크라나키의 경험은 디지털 세대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구성된 새로운 줄거리를 부여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인생에서 겪는 위기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크라나키와 디지털 시대인 모두 자신들을 반영하는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더 이상 정체성의 기반이 된 보편적인 가치관과 전통을 마련해준 단 하나의 문화권에 있지 않게 된 그들은 새로운 행동양식에 걸맞은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각 개인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둔 의미의 프레임을 구성하여 정체성의 “역사-시간적 지속성”을 도출한다.
  이야기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야기의 형식으로 각자의 인생과 타인과의 관계를 꾸며 나가고 이러한 이야기는 개인이 만들어야 하며 이해 가능한 형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 더불어
 이러한 이야기는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확인하고 검증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인물들이 본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용하고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확인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타인과 공통된 이해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의 서술자가 능동적으로 이런 의미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계속 개정할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변경해야 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다시 구성해야 하며, 이야기에 대해 타인과 협의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수립된 맥락에 스스로 결속되기도 한다. 서사의 전개방식에 
따라 특정 문화나 공동체, 가족 등을 언급하게 되며, 이를 통해 선조와 그들의 의례, 가치 등을 우리의 이야기로 인정하고 검증해주는 글로벌 공동체와 연결된다. 또한 실제로 ‘집’에 있지 않으면서도 집에 있는 기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수도 있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처리하고 편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류는 사회적 현실에도 기여를 한다. 이야기는 인쇄물이나 예술 작품, 거주 공간 배치 방법 등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인생과 목표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아’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정의, 특정 시점에 갖고 있는 가치관 등을 상징한다.
  한국인 예술가 최찬숙은 “민북마을의 양지리 아카이브” 작품에 한국의 비무장지대(DMZ) 인근의 한 마을에서 수집한 유물을 모아 놓았다. 작가는 이러한 물품을 조심스레 배치하여 양지리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정체성, 가족, 친족 관계, 공동체 등 보편적인 주제와 그 위치를 모색하는 과정에 관객을 초대한다.
  작품이 정체성에 대해 던지는 주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정체성을 수립할 때 어떤 외부 요소와 구조를 수용하고 동화시켜야 할까? 우리의 서사를 어떻게 전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맥락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할까?
  최찬숙 작가의 작품은 민북마을 공동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민북마을 생활과 마을 주변의 험악한 환경, 마을 주민이 사용하는 물품과 지형적 체계와 매체 생산 등에 대해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설치를 통해 민북마을 이야기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는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통해 “상상적 영역”, 즉 시간과 공간의 단위가 겹치고 탐험적 이동과 협상 과정이 시작될 수 있는 단편적인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라베아 루겐슈타인

라베아 루겐슈타인(b. 1983)은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독립 큐레이터이자 문화미디어학자이다. 주로 학제적 과학/예술 개념의 발전과 생산을 연구한다.


  1. Rutherford, Johann (1990): “The Third Space. Interview with Homi Bhabha” (제 3 공간 . 호미 바바 인터뷰) in Jonathan Rutherford (Ed.): Identity, Community, Culture, Difference (정체성, 공동체 , 문화 , 차이점) , London: Lawrence and Wishart, pp. 207–221. 

  2. Terekessidis, Mark (2015): “Kollaboration” (협업), Suhrkamp, Berlin 

  3. Keupp, Heiner (2003): “Identitätskonstruktion”, presentation at the 5th National Conference for Experiential Education (제5 회 체험교육 국가협회 발표 내용), 2003.9.22 Magdeburg 

  4. Menke, Christoph and Rebentisch, Juliane (Ed.) (2014): "Kreation und Depression. Freiheit im gegenwärtigen Kapitalismus" (창조와 우울. 현대 자본주의의 자유), Kulturverlag Kadamos, Ber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