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빈 모티, 코스미즘, 2015, 28분, 4K 비디오, 사운드, 컬러

『코스미즘』(2015), pp.1–11, 멜빈 모티

열람 시간: 14분

정신이란 많은 것을 아는 여우이거나 한 가지 중대한 것을 알고 있는 고슴도치다. 정신과 태양 사이에, 공기가 가볍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생활권이 자리한다. 날씨, 진동, 구름. 이런 것들은 지구가 가진 생각, 즉 정신의 영역으로, 그 안에서 무작위적인 패턴에 의해 익숙한 형태가 형성된다.

캐나다의 배우 도널드 서덜랜드는 젊은 시절에 영화에서 기이한 에너지를 보여주곤 했다. 영화 지금 보면 안돼(1973, Don’t Look Now)자니 총을 얻다(1971, Johnny Got His Gun) 같은 영화에서 서덜랜드는 섹시하지 않은 감성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아도 파워풀하고 매혹적이고, 거의 섹슈얼한 눈빛 연기를 보여줬다. 마치 나이든 알 파치노가 목소리로 과장된 연기를 하려는 것처럼, 젊은 시절의 서덜랜드는 눈빛으로 과잉 연기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존 트라볼타였다면 에로틱한 아이 컨택트로 부드럽게 만들어나갈 지점에서 서덜랜드는 눈동자에 힘을 잔뜩 주어 다소 징그러운 남성이 되곤 한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면서 그는 안정된 눈빛을 찾아갔고, 자신이 가진 신체적 태도에 부합하는 아버지 상으로 더 많이 캐스팅되었다. 그는 3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피어난 경우로, 지금은 백인 모건 프리먼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서덜랜드는 클라우드버스팅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한 집단의 아버지 상으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그는 피터 라이히(위노나 라이더처럼 생긴 케이트 부시가 맡음)의 아버지인 빌헬름 라이히 역할을 맡는데, 빌헬름 라이히는 다양한 망상 이론에 빠진 괴짜 정신분석가다. 1953년, 메인주에서 블루베리를 경작하는 농부 두 명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가뭄 끝에 작물을 살리기 위해 비를 내려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그를 찾는다. 당시는 아직 텔레비전에서 일기예보가 나오지 않던 때라, 블루베리의 운명은 말 그대로 운에 달려 있거나, 아니면 기계를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기후예언이라는 일종의 과학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18 -19세기에는 굉음이 비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천둥은 항상 큰 비를 동반하고, 큰 전투가 있은 후에 주로 몇 일 동안 비가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대포를 쏘면 비가 내린다는 잠정적 근거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후 패턴상으로는 나흘 정도에 한 번씩 비가 내리기 때문에 능력 있는 장군이라면 맑은 날을 기다려 적을 공격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에는 전투가 보통 사나흘 동안, 혹은 다시 비가 내릴 때가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사실 비가 전투 시기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 전투가 비를 내리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구름 속으로 대포를 쏘아 비를 내리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빌헬름 라이히의 클라우드버스터의 경우, 속이 빈 튜브를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로 사용하는 점만 다를 뿐, 역시 위와 같은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소음을 내지 않고 튜브를 전기 파워 코드로 활용한다. 물을 연료로 사용하는 라이히의 이 기계는 오르곤(라이히가 가설로 설정한 우주의 힘, universal force)을 공중으로 날려 진동과 구름, 그리고 비를 만들어낸다. ‘우주의 오르곤(Cosmic Orgone)’으로 인해 구름은 7월 6일에 터졌다. 일설에 따르면 어린 피터 라이히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농작물을 구한 것을 봤다고 전해진다. 스크린 상에서 도널드 서덜랜드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여우처럼 체포되어 끌려가고, 케이트 부시는 레인 댄스를 노래한다. “난 아직도 오르곤을 꿈꾼다. 당신은 나의 요요, 이-예 예 예 예 요-오—.”

라이히가 하늘로 오르곤을 쏘아 올리고 나서(그 날 저녁에 비가 오고 블루베리를 살려냈다) 6개월이 지난 후, 1954년 1월 11일, BBC 텔레비전에서 32세의 조지 코울링이 최초의 기상보도를 하게 된다. “바람만 불고 비는 내리지 않겠습니다. 빨래 말리기에 좋은 날이 되겠습니다.” 코울링은 영국의 전원 도시 에스크달레뮈르에 위치한 영국 기상청에서 근무했는데, 이 곳에서 코울링의 상사로 일하다가 최근에 작고한 루이스 프라이예 리처드슨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기상예측 방식을 규정하는 이론들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려는 그의 시도를 크게 확장시켜보면, 리처드슨의 작업은 현대 기상예측의 개념을 이끌고 디지털 미래까지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슨은 1913년 영국 기상청 연구실의 디렉터가 되고 1922년에는 대체로 경험적 관찰(결과적으로 수학적 산술로 변화되는)에 기초하여 『숫자형 프로세스에 의한 기상예측(Weather Prediction by Numerical Process)』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는 수학을 기상예측에 적용하는 방식에서 상당히 기술적이고 통계학적인 방식을 취했다. 하늘을 각 변의 길이가 모두 125마일로 이루어진 동일한 크기의 작은 방 25개로 나누고, 각 대기의 블록을 또다시 각 층마다 동일한 부피를 가진 5개의 층위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 25개의 블록을 유형별로 나누어, 타입-P 셀(대기의 기압, 습도, 기온 측정)과 타입-M 셀(속도와 방향 측정)이라는 바둑판 형태의 그리드에 분산시켰다.

리처드슨이 고안해낸 이 차트에 따라 고기압, 저기압, 바람, 구름, 강수량 시스템 등과 관련한 복잡한 대기의 프로세스가 계산이 가능하도록 분리된 영역으로 환원되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서로 다른 프로세스가 상호작용하는 방법과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꼼꼼하게 계산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수학적으로는 무거운 내용이지만, 숫자형 작용 방식을 현재의 기후 상태에 적용하여 미래의 상태를 계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개념 모델이기도 하다. 이 이론의 유일한 문제점은 이론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스템 내에서 작은 꼬임이 발생하면서 작은 소음이 일어나 데이터를 망가뜨렸고, 결과적으로 리처드슨의 초창기 기상예측은 틀린 것이 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는 데 필요한 수식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60개월 동안 24시간 내내 예순네 명의 수학자가 일을 해야 한다. 1920년 당시 리처드슨의 동료들은 이 개념이 놀랍도록 지적인 성과이긴 하지만, 그 숫자형 시스템은 전혀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디지털 시대가 도래해 그가 이루어놓은 개념적 토대 위에 이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나타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접근 방식은 기상예측의 표준적 방식으로 남아 있다. BBC에서 그의 이론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방영하기 불과 몇 개월 전인 1953년 9월 리처드슨은 자택에서 사망했다.

기상예측은 여러 가지 변화의 흐름이 겹쳐 이루어진다. 우선 매일 달라지는 기후 변화, 순환적인 계절의 리듬, 그리고 지구온난화라는 장기적 효과들이 함께 작용한다. 장기적 미래를 내다볼수록 예측도 약해지게 되기 때문에 먼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안개 속에 싸여 있을 수 밖에 없다. 디지털 컴퓨터의 힘으로 문제를 풀 수 없었을 당시에는, 일부 인간 두뇌의 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끄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페도로프(Nicolai Fedorov, 1829 - 1903)는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 즉 지구의 생태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소비 면에서 화석 연료에서 태양열 에너지로 전환하는 중대한 변화가 근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1870년대에 이미 예견했다.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는 지구 자원의 착취를 멈추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일찍이 내다본 것이다. 페도로프의 생각은 온통 미래에 대한 것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에 관해 아주 먼 미래를 내다봤다. 페도로프는 현재 카자흐스탄 국경에 인접한 클리우치라는 마을 출신으로, 가가린 가문 내에서 보헤미안적인 기질을 가진 골칫덩어리였던 프린스 파벨 가가린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다닌 적은 없지만 문화 교육 기관에서 적절한 교육을 받고 러시아의 촌락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인생의 교훈을 배워나갔다. 25세부터 39세까지는 역사 및 지리학 교사로 일했지만 한 학교에서 일 년 이상 일 한 적이 없어서, 정통성의 문제와 더불어 특이한 방랑자라는 이미지로 알려졌다. 성격과는 별개로, 또한 그의 남루한 복장과 수염을 기른 불한당 같은 외모도 지방 학교의 교육 문화에 잘 맞지 않았다. 페도로프는 서서히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가족의 친구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페테르손(술에 취하기를 즐기는 키가 작고 퉁퉁한 체구의 소유자)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페도로프는 페테르손을 통해 모스크바에 있는 루미얀체프 뮤지엄 라이브러리(현 레닌 라이브러리)에서 사서로 일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25년간 그 직업을 유지했다.

사서 역할에 몰입한 페도로프는 누군가 연구를 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 싶은 책인데 실제 당사자가 대여 신청을 하지 않았을 때 그 책을 슬쩍 끼워 넣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로는 도서관 이용자들을 사무실로 데려와 더 많은 책을 대여해주면서 관심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페도로프는 과학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혹은 나아가 우주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들을 글로 써나갔다. 그의 글 중에는 (당시에 새로 등장한) 도서관의 서지 분류 방식에 관한 호기심, 그리고 교육 개혁을 이루는 데 뮤지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글도 포함되어 있다. 비교적 긴 글에서는 에너지 효율성(대기 기류와 태양 복사열을 활용한 에너지 창출)과 농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연적 프로세스의 규제/통제와 같은 주제(비를 인공적으로 내리게 하여 작물 피해를 줄이는 방식) 등을 다루었다. 그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는 바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대포를 쏘는 일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대포를 수평으로 쏘지 않고 구름을 폭파시키기 위해 수직으로 발사한다는, 관점의 급진적 전환을 통해, 과학이 자연 자원을 통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페도로프는 또한 수평적, 뉴토니언, 지구 중심적 사고에서 수직적, 코페르니컨, 우주적 관점으로 사고가 전환되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미래,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태양계와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영원한 삶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이다.

영원한 삶에 관한 페도로프의 생각을 모은 책 『일상 업무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Common Task)』은 두 명의 초창기 제자들과 라이브러리 동료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처음 친구가 되었던 알렌상드로비치 코제브니코프와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페테르손이 그의 사후에 편집하여 출판했다. 에세이, 아티클에서부터 노트와 메모에 이르는 이 비출판물의 모음집은 초판의 경우 표지에 ‘비매품’이라는 스탬프를 찍어 480부를 출판했다. 그 후로 1906년과 1913년에 2쇄, 3쇄 출판이 이루어졌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 데에는 출판물이 통합된 논문으로 기획되지 않았고, 그래서 비체계적이고 복잡하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점도 한 몫 한다. 『일상 업무의 철학』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과학에 대한 헌정서이다. 페도로프는 부패하는 인체를 수집하고 통합하여, 포유류의 세포와 섬유질의 부패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살아 있는 생물과 죽은 생명체의 입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서서히 세계의 모든 원자와 분자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페도로프의 생물 입자는 DNA에 관한 신비주의론적인 선행 연구로 볼 수 있다. 만약 죽음을 단순한 입자의 해체라고 전제한다면, 그 입자들의 부패와 파편화를 야기하는 힘만 정복할 수 있으면 역으로 부패 과정도 반대로 돌릴 수 있고 죽은 몸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의 정복, 즉 페도로프가 말하는 죽지 않는 문명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고 조상의 영혼을 부활시킬 것이며, 이 땅을 걸어 다녔던 사람 그 누구라도 무한히 새롭게 재탄생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내용을 살펴보면, 미래 지구 자원의 부족에 대한 그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죽은 자들이 부활해 살아가기에는 실제 지구 행성이 너무 비좁다. 그래서 페도로프의 미래에서 지구는 하나의 우주 정거장에 지나지 않게 되고, 거기에서부터 전 우주가 개척되고 식민화될 수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분자와 원자를 마스터한 정복자이고, 결국 죽음에 이른 이들은 원하는 [생명체의] 형태를 맘대로 취하여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다. 종속영양생물은 독립영양생물이 되고, 우주가 곧 우리의 몸이 된다. 페도로프가 초기에 제시한 에너지 효율성과 클론에 관한 생각들은 지금까지 유효하지만, 반-죽음 이론은 허구화된 미래를 상상하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연과학의 신비주의적 응용이다.

페도로프의 전체주의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글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스페이스-펑크 운동인 코스미즘의 기반을 형성했다. 동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취한—정통 철학과 신비주의, 종교, 윤리학, 역사, 철학을 결합—코스미스트들은 우주와 인간과 관련하여 기원(origin), 진화, 미래 존재에 관한 시각을 발전시켰다. 페도로프의 글들은 비록 주류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가 일찍이 말했던 우주 시대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래서 1957년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었을 때 소련에서는 이것을 새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오래 전에 나왔던 생각이 마침내 구현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소련의 우주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중대한 계산법을 개발해왔던 영향력 있는 로켓 과학자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머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돈도, 친구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급진주의자 치올코프스키는 16세에 모스크바로 이주해온다. 준청각장애를 가진 외톨이, 망상가, 사회적으로 따돌림 받던 그는 루미얀체프 뮤지엄 라이브러리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 곳에서 코제브니코프와 만나게 되면서 자연히 페도로프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치올코프스키의 약한 청력은 종종 지적 능력 장애로 오인 받기도 하고 교육적 계발에 핸디캡으로 작용했지만 그는 홈스쿨링을 통해 학습한 어린 천재였다. 그의 부모는 그가 개인 학습을 통해 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보냈는데, 결국 루미얀체프 뮤지엄 라이브러리가 그의 임시 캠퍼스가 되었고 페도로프는 그의 멘토가 되었다. 매번 라이브러리에 올 때마다 치올코프스키는 새로운 책들을 잔뜩 받고, 멘토가 된 페도로프와 토론을 이어갔다.

1873년부터 1876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우주 여행에 관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마주 앉아 공부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주제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치올코프스키는, 아마도 멘토는 십대인 자신이 불멸의 세대, 부활한 세대들이 정복하는 행성 간 상호적 우주에 대해 논의하기에 너무 어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그 주제를 직접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페도로프는 치올코프스키에게 우주 시대라는 개념을 알려주려고 애를 썼고, 치올코프스키는 이것을 생각의 양식으로 소화해내어, 마침내 소비에트 우주 탐사의 선구자가 되었다. 로켓을 발사하고 비행하고 안정화하는 법, 우주선 안에서 삶을 유지하는 법, 지구에서 끌어 당기는 중력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연료의 양을 계산하는 법 등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이 독학으로 성장한, 준청각장애를 지닌 괴짜 로켓 과학자에 의해 매우 이른 시기에 이론화 되었다. 저서 『반동적 장치에 의한 우주 탐사(Exploration of Space by Means of Reactive Devises, 1903)』에서 치올코프스키는, 다단계 로켓의 경우 최소한의 지구 위성으로 작동할 때 필요한 액체 산소와 액체 수소의 양을 산출하는 기본 미적분을 ‘치올코프스키 방정식’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성공적인 우주비행에 필요한 중대한 계산법이다. 치올코프스키의 코스미즘은 로켓 공학과 우주인, 우주선 기계학, 우주선 비행, 우주 의약품, 우주 생물학, 항공, 경항공기 내에서 무중력 상태로 샤워하는 법 등에 관한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코스미즘은 보다 자연과학적이고, 페도로프의 이론보다는 덜 신비주의적이었다.

치올코프스키는 모스크바에서 200 킬로미터 떨어진 칼루가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수학 교사 생활을 하며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집에 간이형으로 연구실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험보다는 드로잉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이론가에 가까웠다는 점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역사는 알렉산더 치제프스키(1897 - 1965)로 인해 반복되었다. 치올코프스키의 학생이었던 그는 눈에 띄게 총명하고 재능이 탁월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오해를 받았다. 치올코프스키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많이 흡사한 이 학생을 보며, 자신이 페도로프를 멘토로 찾아냈듯이, 이번에는 자기가 치제프스키의 멘토가 되어 코스미스트의 씨앗을 다음 세대로 전수했다. 대학에서 그가 처음으로 출간한 글 ‘태양의 전기적 제도의 섭동(攝動, perturbation)이 생물학적 현상에 미치는 영향’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 일정 정도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박사논문인 ‘전지구적 프로세스에 있어서 주기성에 관한 분석’(1918년에 ‘역사적 프로세스의 물리적 요소들’이라는 제목으로 광범위하게 출판됨)은 전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이후 “그들은 나에게 진흙을 내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양과 그 밖의 다른 우주의 힘들이 어떻게 역사와 인간 행동에 영향을 주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주류 과학계에서는 그다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학계 내에서 이런 대실패를 겪고 나서 치제프스키는 아카데미나 정부 조직에 들어갈 희망을 잃었고, 집 안의 연구실에서 작업하면서 관심사를 태양에서 대기 이온화로 옮겨 갔다. 치제프스키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 보고서를 칼루가 자연 연구회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페트로비치 라자레프에 의해 채택되었다. 실제로 라자레프 자신이 산업 분야(광산업 등)에 도움이 될만한 지리물리학적이고 지질학적인 탐사 조사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그 후 치제프스키는 라자레프의 생물물리학 연구센터에 초청 받아 자신의 이온화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반테 아레니우스,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막심 고르키 같은 당대의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긍정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결국 교육부로부터 업무 제안을 받게 되었다. 느린 출발, 일부 초기에 인정받지 못한 일이 있었지만 치제프스키는 마침내 대기 이온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과학자로서의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2년에서 1924년 사이, 치제프스키는 보건부 내 생물물리학 인스티튜트의 비정규 컨설턴트 직책을 맡고,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생물 및 약품 분야의 대표 전문가로 활동했다. 1923년에는 블라디미르 듀로프의 서커스 연구실 컨설턴트로도 활동하는데, 여기에서 치제프스키는 동물을 대상으로 대기이온화 실험을 시행했다. 과학적 연구가 성숙해지고 자신의 포지션을 더욱 더 다듬어 가면서 대기이온화와 우주생물학에 관한 연구가 점점 더 많은 국제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치제프스키는 툴론 아카데미 오브 사이언스의 멤버로 선출되고 콜럼비아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생물물리학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된다. 1937년 소비에트 궁 내에 두 개 공기이온화 연구실을 조직하는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9년에는 제1회 세계 생물물리학 및 우주생물학 대회의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국제 과학자 단체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치제프스키는 대기이온화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와 함께, 직접 히스토리오메트리라고 칭한 연구를 병행하여 시작했다. 이것은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프로세스들(전쟁, 혁명 같은 사회적 프로세스를 포함)에 관한 광범위한 통계를 모아, 그 중 어떤 사건들이 태양의 주기와 연관성을 형성할 수 있는지 추론하는 것이다. 이 연구와 동시에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서 연구가 중단되고, 과학적 결과물에 대한 분위기도 변화되었다. 치제프스키는 반혁명주의자로 간주되어 결과적으로 1942년부터 8년 간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10월 혁명에 불을 당긴 것은 프롤레타리아이지 태양의 흑점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가지고 있던 소비에트 체제에서, 태양의 주기가 혁명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치제프스키는 수감 생활 중에 한 수용소에서 발병한 콜레라를 퇴치하는 데 (표백제 가루 같은 미봉책 요법을 사용) 도움을 준 이후 몇 가지 특혜를 받게 되면서, 수용소 내부에 작은 연구실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 사이 치제프스키는 유화나 수채화로 자신이 기억하는 칼루가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1954년에 풀려나면서 그는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에 망명자로 다시 자리를 잡고, 혈액의 미세 순환과 지역의 석탄 탄광에 관한 지질학적 탐사에 몰두했다. 1958년, 투옥과 망명 생활이 시작된 지 16년이 지난 시점에 그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치제프스키 샹들리에를 활용하여 광부들에게 필요한 대기이온화 치료법을 소개했는데, 이것은 그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에 완전히 재적응한 후 그는 대기이온화와 에어 컨디셔닝을 연구하는 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공장과 가금류 농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기 청정 기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는 한편, 혈액 순환에 있어서 전자기장의 유효성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여 결과적으로 미세 순환 생물물리학을 이끌었다.

치제프스키의 보다 실험적인 이론적 연구인 히스토리오메트리는 태양의 활동과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삶/생명 사이의 관계를 통계학적으로 수립하려는 시도이다. 태양 주위의 자기(磁氣, magnetic)적 활동은 지구의 초고층 대기권에 영향을 미치는 자외선과 X-레이 방사를 유발한다. 따라서 지구 대기권 상층부에서 발생하는 프로세스와 현상 등—자기권(magnetosphere)과 이온층(전리층 ionosphere)에서 일어나는 전자기 프로세스들, 극지방의 오로라 현상, 라디오 커뮤니케이션, 대지 전류—은 태양 현상의 직접적인 확장으로 볼 수 있고, 그 결과 이 층들은 태양의 활동과 상호 연관되고 또 그러한 활동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통적인 과학적 사고에서는, (날씨와 기후를 결정하는) 하층 대류권과 (인간이 거주하는) 생물권은 닫혀 있고 고립된 시스템으로, 자외선과 X-레이를 흡수하는 상층 대기층의 보호를 받는 부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치제프스키의 히스토리오메트리에서는, 태양에서 일어나는 변화들(흑점, 폭풍, 그 외 태양의 활동으로 뭉뚱그려 이야기되는 형태들)이 생물권에서 발생하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현상들에도 반영되는가를 들여다본다. 치제프스키는 특히 태양의 활동과 전쟁, 혁명, 감염병 등의 역사적 대 사건들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관찰했다. 태양의 흑점 활동이 순환적 절정기에 가까워질수록 그러한 사건들이 증가하는 반면 흑점이 최소화되는 해에는 그런 사건들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기원전 5세기 이후 당시 현재까지 그가 수집한 역사 자료 데이터에 따르면 태양의 활동은 수 많은 사회문화적 사건들의 발생과 일치한다. 새로운 정치적, 종교적 독트린, 종교적 폭동의 확산, 사회, 군사, 종교 지도자들과 개혁자들의 부상, 기업, 협회, 조합, 연맹, 종파, 파워풀한 단체들의 형성, 예측을 불허하는 세계적 유행병과 자연 재해 발생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치제프스키는 1750년부터 1964년 사이, 러시아에 확산된 감염병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았다. 특히 독감 바이러스와 그 형태, 감염/확산, 기간, 소멸 등은 1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태양 흑점의 최정점 지점과 연관되면서, 태양 활동의 큰 변화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치제프스키는 또한 혈액의 응고 과정을 보면서 이 역시 태양의 활동과 연관된 지자기장(geomagnetic)의 방해와 관련된다는 점을 찾아냈다.1

페도로프 우주관의 경우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근본적으로 생사를 통제하고 우주를 식민화하면서 전 우주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었다. 페도로프의 코스미즘에서 인간은 능동적인 역할을 하지만 치제프스키의 이론은 인간을 수동적인 역할을 맡은 존재, 우리의 복지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자연적 힘들에 종속된 존재로 본다. 이것은 곧 코스미스트들을 모두 동질한 하나의 철학 그룹으로 묶을 수 없고, 각 코스미즘마다 그 자체의 우주[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치제프스키의 우주적 관계성은 그의 연구가 발표된 이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과 다른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들에 의해 입증이 되는 듯 했다. 1966년 7월 7일, 태양의 강력한 표면 폭발이 관찰되었고, 같은 날 일본 전역 10개 도시에서 도로가 위로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유사한 상호연관성들이 다른 도시와 국가들에서도 발견되었다.2 설치류의 개체수가 순환적으로 변화하는 점도 관심 대상이었다. 이에 따르면 설치류는 11년 마다 돌아오는 태양의 사이클과 일치하는 11년의 리듬으로 변화한다.3

보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태양과 지자기 활동이 활발해지면 멜라토닌 수치가 줄어든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4 예를 들어 쥐의 경우, 계절 별로 달라지는 멜라토닌의 수치가 지구의 지자기장 내부의 계절별 변화와 상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5 암이나 신경성 질환, 급성 심장 질환, 심근 경색 같은 질병도 모두 노화 진행에 따라 멜라토닌 수치가 과도하게 낮아지는 것과 연관된다. 혈압의 변화, 혈액의 흐름, 응집, 응고, 지자기적 활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발생하는 심장 부정맥, 심박수 변화, 이 모든 것들이 다 멜라토닌 수치의 영향을 받는다. 태아에는 멜라토닌 수용기(receptor)가 있어서, 지자기적 활동이 높은 기간에 일어나는 급작스런 영아 사망의 증가를 관찰할 수 있다. 정 반대편을 살펴보면, 대만 청리에 위치한 우주 및 원거리 감지 연구 센터의 연구원 잔-옝 리우는 지난 수 십 년 사이에 대만에서 강도 5.0 이상의 지진이 100회 이상 일어났던 점에 관해 탐구했다. 연구 결과, 지하 35km 지점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경우 거의 대부분 지진 발생에 앞서 이온층(전리층, 초고층 대기)에서 전기적 교란이 눈에 띄게 일어났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지구의 내부가 태양의 외부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태양의 대기 안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생태계를 고려해보면 지자기적 활동과 이온층(전리층)의 생물학적 리듬 사이에 발생하는 전 지구적 상호 관련성에 관한 연구들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 열 효과와는 반대로 지구가 데워지고 식는 것 같은, 전례 없는 자기적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지구의 자기(磁氣)란 훨씬 더 강력한 자기 즉 태양의 대기권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치제프스키의 히스토리오메트리는 매크로코즘(대우주)과 마이크로코즘(소우주), 인간과 세계의 내부와 외부 자연계의 리드미컬한 상호 의존 관계가 우주적인 전체인지, 아니면 우연들이 겹친 환영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의 뇌에는 패턴을 복합적 현상으로 상상하여, 천체 사이의 형태를 그리듯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식론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치제프스키의 통계학적 연구는 숫자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내러티브 즉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자신이 파면됐던 사건에 대한 싸움이다. 시간생물학의 아버지인 프란츠 할베르그 교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순환 주기가 태양과 달의 리듬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탐구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39년 주기로 테러가 발생하고, 7일 주기로 심장박동이 순환하며, 급작스러운 심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이나 심장 부정맥의 패턴에서 나타나는 10개월/5개월 리듬은, 하루 단위, 삼사일 단위, 주 단위로 일어나는 태양의 사이클과 일정 정도 상응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괴팅엔 대학의 심리학 명예 교수인 쉬베르트 에르텔은 이러한 주기적 주장을 검토, 조사하는 데 있어서 심리학자이자 별자리 연구가인 미셸 고클랭의 주장을 포함시켰다. 고클랭은 사람이 태어날 때 화성이 위치하는 자리와 그 사람의 미래 직업의 특징 사이의 연관관계를 찾아냈다. (이것은 에르텔의 검증을 통과해냈다.) 1997년 에르텔은 일명 치제프스키의 히스토리오메트리에 관한 비판이라고 불리는 아티클 ‘알렉산더 치제프스키의 주장에 관한 검토’를 썼다. 에르텔은 4000건의 사건으로 구성된 데이터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통계학적 연구에서 나타날 수 있는 편파적인 문제점 등을 엄격히 배제하는 방법론적 기법을 몇 가지 적용하여, 태양의 움직임 리스트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건들의 리스트를 비교했다. 이 참고자료들은 1698년(최초의 광범위한 태양 흑점 활동이 시작된 시점으로 기록된 해)에서부터 1996년까지 발생했던 26회의 태양의 사이클과 비교한 것이다. 여기에 치제프스키의 숫자들이 더해지면서, 결과적으로 에르텔은 태양의 활동과 지구 상의 폭력 사건들 사이의 가설적 연관성을 실제로 뒷받침할 수 있게 되었다. 에르텔은 이 데이터에서 일정한 패턴과 주기성을 인지했지만, 어떤 특정한 태양 방사가 지구 상의 어떤 생명체에 정확히 어떠한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적인 정의를 내리지 못했고, 따라서 개괄적인 과학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사실 치제프스키 또한 그러했다. 두 사람 모두 생물권은 사회권의 한 부분일 뿐이고, 폭력 사건들을 야기하는 사회정치적 요소들이 태양의 자기 에너지로 완전히 규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계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대단히 복합적인 태양지구물리학적 환경이 곧 우리의 내적 혹은 사회적 환경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르텔의 연구는, 상호 교차 레퍼런스가 가능한 다음 시기는, 태양의 표면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는 가장 이른 시점인 2001년이 될 것이라는 예측으로 마무리된다. 23번째 태양 주기는 실제로 그 해에 최고조에 달하고, 9월 11일 아침에 최정점에 이르게 된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보면, 기상예측가인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은 이온층(전리층)과 생명권 사이의 대기를 측정하면서 숫자에 중독되어 갔다. 이것은 비단 날씨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전쟁과도 연관된다. 그는 죽기 전 20년 동안, 역사 교과서와 범죄통계학 자료에 기초한 자신의 연구를 취합했다. 수많은 경찰 보고서 및 신문 자료와 더불어 그는 퀸시 라이트가 1482년부터 1939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정리한 278건의 기나긴 전쟁 리스트를 중요한 자료로 삼았다. 리처드슨은 1820년 이후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를, 가장 큰 호기심을 유발하는 ‘죽음의 분쟁(deadly quarrels)'으로 분류했다. 여기에는 개인적 다툼이나 사망자 통계가 1인인 살인 사건에서부터 세계 전쟁까지 포괄되어 있다. ‘죽음의 분쟁’에는 살인, 절도, 봉기 등 온갖 다양한 규모의 전쟁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지진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자연적 사건이나 재난 등은 제외되었다. 기근이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어도 그것이 분쟁의 직접적인 결과인 경우에는 포함시켰지만 그 외의 경우는 제외했다. 리처드슨은 1820년부터 1949년 사이에 발생한 죽음의 분쟁 315건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그 원인과 조건을 설명하고, 각 사건에 연루되었던 대략의 사상자 수를 정확히 기재했다. 내용을 단순화하기 위해 리처드슨은 모든 것을 양자가 대치되는 분쟁에서 나타난 사상자로 묶어냈다. 여기에는 고의적 혹은 간접적인 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사망한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퀘이커 교도였던 리처드슨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평화/반전주의적인 목적에서였고, 따라서 이것은 분명 사랑의 노동 결과물이다. 리처드슨 자신도 평화로운 세계에 기여하기를 바랬고, 자신의 연구물들이 미래에 반영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일기예고처럼), 그리하여 피를 흘리는 일이 줄어들기를 기대했다. 그의 연구는 외교 정책 분야의 교과서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역사상 발생한 모든 살인 사건을 세는 것도, 모든 전쟁의 수를 헤아리는 것도 모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쟁은 절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분리되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하고, 멈췄다 재개되기도 한다. 더욱이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폭력 분쟁을 단일한 모델로 분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리처드슨은 이 문제를, 마치 천문학자들이 별을 헤아리듯이, 분쟁의 광도/규모로 정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해결했다. 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의 밑수 10로그에 따라 각 분쟁을 정리한 것이다. 밑수 10 로그는 몇 번에 걸쳐 10의 배수가 되어야 해당 숫자가 되는가를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100명의 사상자를 남긴 폭동은 광도/규모 2(밑수 다음에 오는 0의 수)가 되고, 1천만 명이 사망한 분쟁은 광도/규모 7(0이 7개)이 된다. 죽음의 분쟁을 로그 스케일에 기초하여 정의하는 데에는 윤리 문제를 떠나 폭력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려는 리처드슨의 목적도 담겨 있다. 10만 명이 죽었는지 20만 명이 사망했는지에 대한 불명확성은 광도 5에서 5.3의 범위로 해석된다.

1 = 1
2 = 100
3 = 1000
4 = 10.000
5 = 100.000
6 = 1.000.000
7 = 10.000.000

단일 살인 사건에서부터 세계 전쟁에 이르는 분쟁들을 하나의 스케일 위에 놓고 통합된 폭력 이론을 모색하려는 과정을 통해, 리처드슨은 일반적인 트렌드를 분석해낼 수 있었다. 그가 첫 번째로 관찰해 낸 것은 폭력이 멱법칙(冪法則, power law 하나의 수[]가 다른 수의 거듭제곱으로 표현되는 두 수의 함수적 관계) 관계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지진 통계학과 흡사하게, 지속적으로 예측 가능한 분쟁의 관계들을 찾아낸 것이다. 멱법칙에서는 사건의 규모가 클수록 사건 자체가 작아지게 된다. 이는 1억 명이 사망하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고, 10억 명이 죽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보다도 적다는 것, 그러나 몇 백 명이 사망하는 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더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리처드슨의 그래프를 보면 전쟁이 광도/규모(사상자 수를 포함한)에 얼마나 거의 정확하게 반비례(반 멱법칙)하여 나타나는지를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극단적인 대규모 전쟁은 몇 명씩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폭력 사건보다 훨씬 드물다는 것을 누구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멱법칙 관계는, 대규모 전쟁 역시 소규모 분쟁만큼이나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 때는 과도하게 복합적이고 특이하여 예측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리처드슨은 폭력 사건 발생을 지배하는 기저의 법칙이 있다는 점을 발견해냈다. 그러한 사건들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의 정황(circumstances)을 인지할 수 있고, 그렇게 인지 가능한 전쟁은 막을 수가 있다는 논리다. 리처드슨은 이러한 정황들—전쟁으로 확대되는 사회적, 심리적 요소들—을 ‘골칫거리(annoyances)’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신체 형상, 피부색, 냄새, 무지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리처드슨은 분명한 사실을 주저 없이 말한다. 그 전쟁들은 다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앞서 발간한 『숫자형 프로세스에 의한 기상예측(Weather Prediction by Numerical Process)』과 달리, 리처드슨의 『죽음의 분쟁에 관한 통계학(Statistics Of Deadly Quarrels)』은 수학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단기간별, 계절별, 장기간의 분쟁 사이클을 분석하는데, 그는 계산적인 모델을 사용하지 않는다. 수집한 데이터를 재현한 그래픽은 시간에 따라 전쟁의 횟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여주고, 리처드슨은 (비록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1820년 이후 인간의 호전성이 줄어들었다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사실 그의 연구는, 1820년부터 1953년 사이에 전쟁은 줄어들었지만, 전쟁 관련 사망자 수는 증가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보다 파괴적인 전쟁으로 가는 경향을 시사한다. 가장 근래에 이루어진 연구들의 경우 리처드슨의 분석을 뒷받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4세기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길었던 대권력 평화의 시대였다. 국가들 간의 전쟁—소권력 대 소권력, 대권력 대 소권력, 대권력 대 대권력—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극히 보기 드문 일이 되었다. 시민 전쟁의 경우, 1960년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수적으로 증가했다가 그 후로 감소세를 보였다. 1945년 이후 핵무기 사용 사례가 없었고, 슈퍼파워, 대권력들, 이를테면 서유럽 국가들이나 주요 선진국들 간의 무장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세 이후 세계는 보다 평화로워졌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통합 이론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실제 장기적으로 전쟁이 감소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일시적인 휴지기를 맞은 것일 뿐인가? 역사에 내러티브 상의 일관성이 실제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흐름이 단지 무작위적인 해법의 과장일 뿐인가? 지구 상의 폭력은 실제로 태양 관련 패턴을 따르는가, 아니면 마치 천체의 형상을 그리기 위해 점들을 연결하듯이 무작위적인 데이터에서 이야기를 상상해내는 것인가? 미래는 언제나 과거와 같은 것인가? 일반화가 가능한 패턴을 통해 실제로 미래를 추정할 수 있을까? 케이트 부시가 또 다른 레인 댄스를 출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안고, 그냥 무작정 걸어가보자.

전류는 특정한 주파수로 흐르기 때문에 유사한 주파수대에서 시그널을 보내는 몸체를 찾아 서로 연결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태양과 지자기적 전류는 7.8Hz부터 51Hz 사이에서 작동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0.5Hz부터 50 Hz 구간과 유사하게 겹친다. 이 주파수 구간에서는 대기가 노이즈 즉 소음으로 가득하다. 소리-노이즈, 전기적 노이즈, 진동 등, 이들은 모두 대기의 텍스처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전통적으로 모든 노이즈의 근원은 퀀텀 노이즈, 즉 소음 입자가 얇은 공기층으로 쪼개지는 방식과 관련한 무작위적인 변동을 생성해 낼 수 있다. ‘트루 랜덤 넘버 제너레이터(True Random Number Generator, 진정한 무작위적 숫자 생성기)’라고 불리는 기계는 퀀텀 노이즈를 잡아내어 그 시그널을 무작위적인 일련의 수사(numerals)로 변환시키는 데 사용된다. 컴퓨터에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무작위적 숫자들은, 보안 소켓 계층(SSL, Secure Socket Layer)과 같은 인터넷 프로토콜에서 데이터를 안전하게 전송하는 암호키를 생성하는 데 사용된다. 트루 랜덤 넘버 제너레이터는 랜덤 키를 계산된 프로세스에 반하여 사용하는 하드웨어 주도적 프로세스를 만들어냄으로써 해커들의 접근을 막아낸다. 따라서 퀀텀 노이즈는 이론상 완벽하게 예측이 불가능하고, 그 생성기는 무작위성에 관하여 가장 엄격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물리적인 실딩(보호막) 장치들이 존재하여, 일반적인 노이즈에 영향을 주고 또 반대로 퀀텀 노이즈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환경적 요소들의 일차적 왜곡을 제거한다. 예컨대, 휴대폰과 텔레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휩싸이면서 전기적, 라디오 시그널이 증가하여 대기의 텍스처를 변화시킨다. 테러 공격과 같은 중대한 글로벌 사건이 발생하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증가하면서 대기는 더 많은 전기적 노이즈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트루 랜덤 넘버 제너레이터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보도가 증가한 시기 이전에도, 그 후에도, 그 중에도 변함없이 랜덤한 결과들을 제공할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인스티튜트 오브 노에틱 사이언스와 연결된 연구팀에서는 기계에서 생성된 랜덤 넘버 시퀀스가 예상했던 랜덤 범위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날과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트루 랜덤 넘버 제너레이터는 전 세계 몇몇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데—일부는 뉴욕시에서 70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이 날에는 모든 제너레이터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그 전이나 그 후의 일반적 랜덤 범위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무작위성의 범위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는 표준 장치는 암호해독기와 전후 교차 참조 방식을 사용하고, 허용 범위의 평균(에러의 마진) 오차는 0.028인데, 9월 11일 아침부터 9월 13일 정오까지는 오차가 6.5를 나타냈고, 특히 11일 오전 8시35분부터 12시 45분(미국 동부 시간) 사이에는 비정상성이 정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오류 편차는 유일무이할 뿐만 아니라 1998년부터 2002년 사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대기 중에 물리적 프로세스들이 미치는 영향이 랜덤 넘버의 최종 시퀀스에서 차단되었다는 것은 트루 랜덤 넘버 제너레이터가 강렬한 전 지구적 사건들 즉 인간생활권, 인간의 의식과 상호 연관되는, 대기 중의 다른 요소를 포착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두 개의 행성이 공시화된(synchronized) 중력의 조화 속으로 연결되어 들어가면 이 둘은 우주적 울림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전 우주에서 일어나는데, 대체로 토성이나 해왕성 같은 소행성들과 달이 여기에 관여한다. 2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토성의 해를 위해 세 개의 해왕성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동일한 시간 간격을 두고 정확히 동일한 지점에서 만난다. 우리의 내적 세계 혹은 의식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상호 중력의 이끌림 속에 존재하는, 외계 세계와 잘 조율된 공시성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우연을 질서로, 무작위적인 노이즈를 완벽한 피치로 변화시키는 울림에 딱 들어맞을 때까지 우리는 타원 궤도에서 길을 잃은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완벽한 피치가 이루어졌을 때 우주는 우리를 향해 노래한다. 당신은 나의 요요, 이-예 예 요-오—!

멜빈 모티, 코스미즘, 2015, 28분, 4K 비디오, 사운드, 컬러

멜빈 모티

멜빈 모티(1977년 출생)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거주하며 시각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역사적, 과학적, 신경학적 과정들을 실험한다.


  1. N. A. 슐츠, A. T. 플라토노바, E D. 로즈데츠벤스카야 참조 

  2. 러시아의 A. I. 오시포프, V. P. 데샤토프, 일본의 시로 마사무라 

  3. V. 알렉산드로프, V. N. 야고딘스키 

  4. 버치(Burch) 외(1996) 

  5. 바르트슈(Bartsch)외 (1994) (True Random Number Generator, 진정한 무작위적 숫자 생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