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 707의 프로토타입인 보잉 367-80. © 이영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 이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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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 1

브루노 라투어가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를 보면서 “거 봐, 내가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고 했잖아”라고 말할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근대란 몇 가지 분리에 기초한다. 하나는 문명과 자연의 분리다. 근대는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생산물들을 만들었고 그것들은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다. 또 하나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분리다. 그것은 문명과 자연의 분리의 다른 몸이다. 근대는 문명과 자연을 분리시켜 문명의 힘으로 자연을 이해했고 정복하여 활용했다. 그런데 라투어는 그 분리는 사실상 이루어진 적이 없고 자연과 문명은 한데 섞여 있는 하이브리드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라투어의 말이 맞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문명 밖에 있는 자연물이 아니라 문명과 경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과학이 풀어야 할 문제이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정부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고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편견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 정부가 중국에 대해 취하는 조치나 입장에 대해 야당이 공격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입장차의 문제이기도 했다. 문제는 누구도 문제의 실체를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조치는 사후적이거나 주변적이다. 누구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심장에 일격을 가해 제거할 수 없다. 바이러스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가 세워놓은 찬란한 업적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다. 왜 그럴까.

근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문명의 다양한 이기를 통해 그 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현미경, 망원경, 스펙트로메터, 오실로스코프 등 수많은 관찰도구를 통해서, 갖가지 통계조사나 분석방법을 통해서 근대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아주 큰 것까지, 아주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까지 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바이러스도 그 중에 하나다. 미생물학의 창시자 혹은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코흐가 현미경으로 박테리아를 관찰한 이후 미생물도 볼 수 있는 존재가 됐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구성성분이나 생존원리, 크기도 다 다르다. 여기서는 자세한 서술은 생략) 코흐는 탄저균, 콜레라균, 결핵균 등 무서운 균을 세 가지나 발견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병들의 치료방법이 다 나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바이러스 자체는 현미경으로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일으키는 병은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면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병은 바이러스와 사람,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는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삶의 인프라는 ‘볼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통제되고 이용된다. 예를 들어 지하철은 중앙 통제실에서 각각의 모든 편성이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통제가 가능하다. 비가시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 동작센서도 있고 가시적인 방법인 폐쇄회로 카메라의 복합적인 작용을 통해 지하철 편성의 위치와 속도, 상태를 알 수 있다. 공항이나 항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도시 전체도 마찬가지다. 도시 전체에 깔려 있는 수많은 센서들과 폐쇄회로 카메라들은 도시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곳곳에 설치돼 있는 감시, 기록, 분석 장치들 덕분에 도시나 공항, 지하철역 어느 지점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지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사람×환경의 매트릭스에 바이러스를 곱하면서 생긴다. 가뜩이나 유동적인 실체인 군중에다가 더 유동적인 바이러스가 곱해지니까 그 현상은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 누가 병에 걸리는지 알 수 없으니까 양성 반응 몇 명, 확진자 몇 명 하는 식의 사후통계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한 전체를 봉쇄한 것이나 이웃도시 전체에 아예 외출금지령을 내린 것은 병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까 통째로 검은 막으로 감싸서 모두 다 장님을 만들어버린 조치이다. 즉 누구도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차라리 모두가 똑같이 바보가 되버리자는 것이다.

암은 무서운 병이지만 감염병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의 몸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면 발견하여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감염병은 퍼지기 때문에 들여다 보기가 힘들다. 감염병이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 18, 19세기였는데 21세기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근대의 성과가 통째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우리가 들여다 본 것들이 과연 정확한 것이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온갖 정밀한 사진으로 찍어서 알게 된 먼 우주의 모습, 생물체의 세밀한 구조, 혹은 심지어 스포츠의 명장면 등 말이다. 과학에서부터 엔터테인먼트에 이르기까지, 시각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근대성은 사실은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눈 멀게 하는 체계였던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이 세상은 통째로 블랙박스이다. 다만 겉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두드려 보아 반응을 보고 그 결과를 추론하여 안에 뭐가 들어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블랙박스들을 들여다 본 결과를 논문으로 써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이건 먼 우주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상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어떤 대상의 속에 복잡한 것들이 있는데 겉을 둘러싼 아주 얇은 막이 시각이다. 그런데 근대인은 그것을 정밀하게 기록했다고 해서 속까지 다 알았다는 오만 속에 살고 있었다. 이제까지 근대의 시각장치들이 보여 온 것은 다 껍질이다. 그런데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마치 속을 다 들여다 본 양 떠들어 왔다. 근대는 확실히 시각의 시대이고 과학자에서부터 스포츠 팬에 이르는 많은 인간들이 시각적인 것의 위력에 몰입하여 이 세상을 다 안 듯 기고만장 해 있었다. 본 것은 겨우 껍질 뿐인데 말이다. 블랙홀에서부터 세포나 분자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델링을 정밀하게 하니까 마치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이 착각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아주 고약한 블랙박스지만 근대인이 만들어놓은 시각의 체계는 얄팍한 속임수였을 뿐임을 토로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많은 희생자를 내겠지만 몇 달 후면 해결될 것이다. 아마 그래도 왜 해결됐는지도 모를 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보면 어떤 문제가 어찌어찌 해결은 됐는데 왜 해결됐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딱 한 가지 교훈 만이라도 배워야 한다. 근대의 시각성은 한계가 많으니 전적으로 믿지 말고 다른 패러다임의 문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물질, 시각, 사고, 텍스트, 감각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결합돼 있는 체계인데 아마 인간은 아직 그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폐쇄회로 티비를 통해 도시의 우범지대를 감시하는 방법에서부터 현미경으로 미생물체를 들여다보면서 연구하는 방식,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현장의 진실을 전하는 패러다임, 약도로 국민은행 가는 길을 알려주는 방식 등, 모든 시각체계를 통째로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 2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다시 한 번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는 앞 편에서 쓴 것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그렇다. 근대인의 핵심은 우리가 땅 위에 당당하게 우뚝 선 주체라는 것이다. 주체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결정권이 있고 대상을 이해하고 터득하여 다룰 수 있는 존재이다. 즉 대상을 마스터 한 존재이다. 대상을 파악하면서 주인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주체가 그렇게 우뚝 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해준 근대의 과학기술이다. 하지만 과학기술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병이다. 물론 근대 의학 덕분에 병은 많이 정복됐다. 하지만 병이란 뭔가. 사소한 감기몸살에서부터 불치병에 이르기까지, 일단 병에 걸리면 인간은 병에게 꼼짝을 못한다. 몸도 마음도 뜻대로 안 된다. 병에 걸려 있는 동안 인간은 주체 노릇을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릇’이라는 말이다. 주체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나 능력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정에 맞게 발휘되는 어떤 지위나 권한이다. 즉 주체는 수행적인 것이다. 퍼포머티브하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도 호령할 때 장군이지 병석에 누워서 시름시름 앓고 있다면 장군이 아니다. 수행성은 맥락에 의존하며 많은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인간은 그런 조건들과 제약들 사이를 절묘하게 피하거나 이용하면서 주체 노릇을 한다. 그런데 병은 주체의 수행성을 차단해 버린다. 병에 걸린 인간은 심신의 작동이 멈춰버린 생명체 덩어리일 뿐이다.

물론 병을 고쳐주는 약이나 의술, 의료기관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병을 고쳐주는 것은 근대의 과학기술이지만 병을 고쳐주는 존재는 한 두 사람의 주체가 아니라 라투어가 하이브리드라고 말한 복합체이다. 그것은 약에서부터 의술, 혹은 의과학, 병의원, 그것을 운영하는데 관여되는 온갖 법규정의 복합체이다. 예를 들어 항생제에 대한 내성 때문에 요즘 병의원은 항생제를 무조건 많이 처방할 수 없다. 병의원을 평가하는 기관에서 점수를 매기는데 항생제 처방을 많이 하면 점수가 깎인다고 한다. 예전에는 병원이 돈 벌려고 필요치 않은 경우에도 제왕절개수술을 마구 했었는데 요즘은 그러면 점수가 깎인다고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그런 평가를 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병원은 규정의 제약을 받는 존재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병은 하이브리드 덕분에 낫는 것이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낫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료체계는 언어와도 같다. 모든 사람이 쓰기는 하는데 그것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병이 낫는다는 사태도 누가 주체인지 불분명하다. 병과 의료체계의 복합체가 운때를 잘 만나면 낫는 것이고 아니면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인은 그런 정체도 불분명한 하이브리드의 힘을 빌어 병을 고치면서 그것이 인간의 주체적인 노릇 즉 수행성의 결과라고 착각하고 있다.

근대인이 주체라고 잘난 척 하고 다니지만 실은 주체가 아니라는 점은 여러 학자와 예술가들이 밝혔다. 프로이트는 이미 20세기 초 인간은 분열된 존재임을 밝혔고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분열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작업들을 내놨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 자기결정권과 피결정력, 선과 악 등 수 많은 선들을 따라 분열돼 있다. 그럴싸하게 통일된 존재인 양 온갖 수행들을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경로로 인간 주체란 허상일 뿐이라고 해체해 버렸다. 푸코는 주체란 근대의 관리체계의 산물일 뿐이라고 했고 라캉은 프로이트를 이어받아 인간의 의식이란 한낱 사물보다 더 낫지 않다고 했다. 이 양반들이 억지로 주체의 허상을 현학적으로 꾸며내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이 세상 온갖 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하이브리드일 뿐인데 혼자서 당당히 서 있다고 착각해온 것을 폭로한 것일 뿐이다.

그 상황에서 병이란 인간의 주체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며 어떤 때는 인간이 암에게 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기기도 하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존재다. 수많은 사람을 쓰러뜨려온 암 앞에서 인간이 주체임을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승률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암이 인간을 철저히 이긴다면 인간은 더 이상 주체라는 소리를 못하고 암이 이 세상의 주체가 될 것이다. 인간이 병에게 주체력을 빼앗기면 쪽팔리니까 무서운 병일수록 집중적으로 달려들어 정복하려 하고 덕분에 승률을 회복하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경우는 어떤가. 완벽하게 통제 불능이다. 이건 영화에나 나오던 카오스다.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잡혔지만 러시아와 미국의 상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현재 상황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완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의료기관도 행정기관도 정부도 학교도 산업계도 다들 패닉해서 허둥거릴 뿐 누구도 자신 있게 문제의 고삐를 쥐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이 탄 초대형 크루즈선이나 항공모함도 세울 정도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능한 주체가 아니고 뭔가. 그런데 이는 그 바이러스가 특별히 무서운 존재라서가 아니라 원래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이 온갖 규율과 조건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는데 그 약점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어젠가 어느 전문가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실제로 대단한 병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봤다. 다만 그것을 둘러싼 질병-사회-제도-기관-심리-정치의 하이브리드가 현재 아주 안 좋은 쪽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어쩌면 우리가 같이 살아야 할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종’이라는 말답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새롭게 나타났고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당뇨병 같은 불치병은 친구처럼 평생 데리고 다스리며 살아야지 한 번에 때려잡으려고 하면 안된다고 한다. 이런 말은 인간이 당뇨병을 이길 수 없으니까 타협할 수밖에 없음을 비굴하게 토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이 원래 그런 것이다. 감기는 안 그런가. 살아 있는 동안 평생 재발하는 것이 감기이다. 그렇다면 감기도 당뇨병처럼 친구처럼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일단 당장의 감기가 나으면 ‘감기가 뚝 떨어져서 몸이 거뜬하다’며 달려 나간다. 감기는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사람 몸을 떠난 것인데도 말이다. 돌아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감기다. 한때 정복됐다고 했던 결핵도 다시 나타나고 있고 위생과 방역 덕분에 사라졌다고 했던 이도 다시 나타났다. 실제의 귀환이 아니라 질병의 귀환이다. 결국 인간은 완벽한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병을 때려잡아 없앨 수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어찌어찌 진정됐다고 치자. 이런 일이 다시는 오지 않을까? 몇 달 후, 몇 년 후, 또 다른 신종 바이러스가 나타날 것이다. 질병은 귀환하니까.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너무도 당당하게 대지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대지의 지배력이라는 면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이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 인간 주체는 허술한 것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알려주고 있다. 거의 케이오 펀치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기회에 배워야 한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주체이고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인간을 위해 죽이고 부수고 개조해서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하찮은 것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 기회에 인간이 대상과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는 방식과 태도, 다른 인간 마저도 관리의 대상으로 삼아온 근대의 태도는 통째로 반성되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3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의 먼 원인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보잉707이 제트여객기로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했다. 그후로 여객기들은 대륙을 마구 가로지르는 횡단비행을 하기 시작했고 지구는 대폭 작아졌다. 그 일의 영향 때문인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1962년에 출간된 『구텐베르크 은하계: 인쇄 인간』에서 그 유명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을 처음 쓴다. 마을이란 오가기에 만만한 공간의 단위이다. 즉 슬리퍼 끌고 걸어서 담배 사러 갈 수 있고 가볍게 마실 다닐 수 있는 것이 마을이다. 제트 여객기 덕분에 슬리퍼 차림으로도 대륙 간 여행을 할 수 있으니 정말로 지구는 하나의 마을이 된 것 같다. 거리를 킬로미터로 재지 않고 시간으로 잰다면 유럽에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한 달이 걸리던 1930년대에 비해 13시간이 걸리는 오늘날 지구의 크기는 훨씬 작아졌다고 할 수 있다. 지구가 작아지면서 많은 것들이 가능해졌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큰 부담 없이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점프할 수 있게 됐고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폭탄을 보내는 것도 쉬워져서 1960년대의 미국 사람들은 소련의 핵폭탄이 자기 집에 떨어질까 두려워 각자 집 지하실에 핵방공호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비행기는 점점 빨라져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대서양을 3시간 20분만에 횡단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확 퍼지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지구의 크기를 급속하게 쪼그라트려 놓았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빠르고 커져서 많은 인원을 순식간에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자 바이러스도 같이 옮겨진 것이다. 바이러스의 숙주가 인간만 아니라 비행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제서야 인간들은 '아차차 우리가 지구상의 거리를 너무 좁혔군'하며 뒤늦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는 제트여객기가 좁혀 놓은 지구의 크기를 다시 넓히려는 시도이다. 그간 지구를 쪼그라트려 놨는데 그 결과가 재앙에 가까우니 다시 지구를 쭉 펴서 멀게 할 수는 없고 만만한게 개인이라 그들에게 거리를 두라고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인간보다 더 강하고 영특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마치 해결책을 제시하듯이 지구를 쪼그라트려 놓은 주범인 비행기들을 세워버렸다. 비행기만 세운게 아니라 호화여객선과 항공모함도 세우기는 했으나 여객기들을 세워놓은 것이 가장 타격이 크다. 지구가 멈춘 날 같은 SF영화가 있긴 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실제로 그렇게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미 한국의 국적 항공사들도 죽겠다고 난리고 에어버스 A380같은 초대형 여객기의 조종사들은 면허를 유지하려면 90일 동안 최소 3회 이상의 이착륙을 해야 하는데 A380은 전 세계의 항공사들이 다 운항을 중지해 버렸기 때문에 몇 달만 있으면 무면허 상태가 될 위기에 놓여 있다. 문제는 A380이 멈췄다는 데만 있지 않다. 어차피 초거대 실패작인 이 비행기는 에어버스가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령이 지나면 더 이상 볼 일은 없게 되겠지만 문제는 여객기로 사람만 나르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객기의 상당수는 화물기이고, 화물기는 급하고 귀한 화물을 주로 나른다. 재벌기업 회장님을 위한 귀하고 신선한 식품에서부터 첨단 전자제품, 몸값이 비싼 경주마 등이 화물기로 운송된다. 양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위기를 겪지 않았던 항공산업이 붕괴위기에 이르렀다. 팬암(Pan Am) 같은 항공사는 2차 대전 동안에 유럽전선으로 군장성과 많은 인원들을 실어 나르며 열심히 돈을 벌었으나 현재 그런 식의 위기 상황 비즈니스는 없다. 이제 일본이나 중국은 두 시간 짜리가 아니라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곳이 됐고, 열몇 시간 짜리 유럽이나 미국도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덕분에 지구는 다시 넓어졌다. 올 겨울에는 다시 창궐할지도 모른다고 하니 지구가 언제 다시 좁아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생각보다 오래 가서 이 거리가 다시 좁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트여객기 덕에 60여 년간 좁은 지구에서 잘 살았는데 그것은 일장춘몽이었을까? 뇌도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간의 똑똑함을 능가하고 있으니 우리는 바이러스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제트여객기 덕분에 근대인은 쓸데없이 많이 싸돌아다녔다. 꼭 필요하고 중요한 공무나 사업, 유학 외에도 심심하면 바람 쐬러 외국에 휙 갔다 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덕에 소비에 기초한 관광산업과, 이와 연관된 온갖 산업들이 발달하고 경제규모도 커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말하고 있다. 이제 쓸데없이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 자신에 대해 반성하며 글을 쓰거나 생각에 침잠하라고. 그리고 그 동안 제트여객기 덕분에 부풀려놓은 경제규모도 좀 줄이라고.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간이 근대 이후로 발전시켜온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테크놀로지를 발전시켜 온 지혜도 위협받고 있다. 제트엔진에 대해서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엄청난 지혜의 집적체이다. 굳이 지혜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제트엔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문제들이 나타났는데 그것을 온갖 창의적인 노력과 사려깊음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1930년 영국의 프랭크 휘틀(Frank Whittle)이 제트엔진을 처음 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트엔진은 무수한 난관을 헤치고 발전해 왔다. 그 중에서 한 지점만 말하자면 터보제트에서 터보팬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제트엔진은 터보제트였다. 이는 앞쪽에 있는 압축기가 공기를 빨아들여 연소실로 보내면 연료와 섞인 압축공기가 폭발하고 이 폭발가스가 터빈을 돌리면서 배기노즐을 통해 대기 중으로 빠져 나가고 그 반작용으로 비행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추력을 얻는 구조다. 제트엔진의 지혜는 뒤쪽의 터빈축과 앞쪽의 압축팬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폭발가스의 힘으로 터빈을 돌려서 얻은 회전력은 거의 손실 없이 고스란히 앞쪽의 압축팬으로 전달된다. 그러면 압축팬은 더 빨리 돌아 더 많은 공기를 빨아들여 압축한다. 그러면 더 강한 폭발이 일어나고 강한 폭발은 터빈을 더 강하게 돌리고 더 큰 추력을 낸다. 그러면 비행기는 더 빨리 날게 되고 그 속력에 의해 더 많은 공기가 흡입구로 들어온다. 결국 흡입구-압축팬-연소실-터빈-배기노즐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승작용을 일으켜 엔진은 큰 추력을 내어 음속도 돌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터보제트엔진에는 단점이 있었으니 소음이 너무 크고 추력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요즘의 제트엔진은 오염 물질 배출과 소음에 대한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아예 사용을 할 수가 없다. 보잉707에 처음 썼던 엔진이 터보제트엔진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 여기저기서 비행기 소음피해에 대한 민원이 하도 많아서 터보제트엔진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엔진이 됐다. 엔지니어들은 그래서 맨 앞의 팬을 대폭 크게 늘린 터보팬엔진을 개발했다. 엔진 앞쪽의 직경과 끝쪽의 직경이 거의 같은 터보제트엔진과 달리 터보팬 엔진은 앞에 아주 커다란 팬이 달려 있기 때문에 앞쪽 직경이 아주 크다. 이제까지 개발된 제트엔진 중 가장 강력한 엔진인 제네럴 일렉트릭의 GE9X는 팬의 직경이 339cm에 이른다. 이렇게 큰 팬에서 압축된 공기의 상당부분은 엔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엔진 바깥을 따라 흐른다. 이를 바이패스(bypass)라고 한다. 그냥 옆으로 흘려보낸다는 얘기다. 엔진 속을 통과하는 유속이 빠르고 온도가 높은 공기에 비해 팬에서 나온 느리고 차가운 공기가 감싸기 때문에 엔진의 소음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터보팬은 커다란 프로펠러 같아서 그 자체로 추력을 낸다. 요즘 여객기에 많이 쓰는 제너럴 일렉트릭 GE9X나 프랫앤 휘트니 4000계열 엔진은 터보팬이 엔진 전체 추력의 80% 가까이를 낸다. 그리고 터보팬 엔진은 터보제트 엔진에 비해 연료 효율이 좋아서 대륙간 비행에도 좋을 뿐 아니라 거리가 짧은 유럽의 도시간이나 국내선 항공기에 많이 쓰인다. 오늘날 제트엔진의 90% 이상은 터보팬엔진이다. 심지어 순항미사일에도 터보팬엔진이 쓰이고 있다. 아마도 터보팬엔진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항공산업이 대폭 위축되니 이런 지혜가 말짱 도루묵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여객항공기의 90% 이상을 띄울 수 없게 됐는데 엔진이 터보제트건 터보팬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트엔진은 근대 이후 인류가 개척해온 과학기술의 극히 일부다. 그것들을 몽땅 무효로 만들 수는 없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분명히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제까지 개발되온 과학기술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지혜의 축을 완전히 뒤틀어야 할 것 같다. 전 세계가 마스크와 진단키트가 없어서 쩔쩔 매는 꼴을 봤으니 이제 무엇을 개발해야 할지는 분명해졌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에서 ‘더’를 빼버리고 다른 것을 넣어야 할 것 같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의 반대가 ‘더 느리게, 더 적게, 더 비싸게, 더 비효율적으로’는 아니다. 이제부터 ‘더’ 대신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이영준

이영준은 기계비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