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ives Matter에 대해 이야기하기, 최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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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통해서 저는 세 가지 난제에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제 안의 인종차별을 탈(脫)학습unlearning하는 것입니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저자 이제오마 올루오Ijeoma Oluo는 2018년 『인종 토크: 내 안의 차별 의식을 들여다보는 17가지 질문So You Want to Talk about Rac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백인 우월주의 체제 하에 살고 있다면 이 체제와 싸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루된 것이다. 불의한 구조와 제도에 중립이란 없다. 쉽게 손을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1 올루오의 글을 반추하는 동시에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저는 내면의 인종차별적인 생각과 백인 우월주의를 발견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이후 저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인 미국과 한국 양쪽 모두에서, 그리고 각 사회 내의 학교, 직장, 공동체 등에서 구조적인 인종차별과 암묵적인 편견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지인들 중 한국인들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인종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은 방어적으로 각자가 경험한 소외나 차별에 대해 말합니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동체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인종차별이 드러나는지 예민하게 관찰한다면 이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둔감하다면 인종차별을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거나 때로는 어떤 것이 인종차별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피부색 혹은 인종으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삶 전체에 퍼져 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말입니다.

한국 친지들과 Black Lives Matter 이야기 하는 방법. 이 글의 초안. 2020년 6월.

두 번째는, 불완전한 얼라이십allyship2의 중요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시적연산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3에서 저와 ‘Teaching as Art’ 수업을 함께 하고 있는 애슐리 제인 르위스Ashley Jane Lewis4의 말에서 빌려왔습니다. 얼라이십은 ‘억압받거나 차별당하는 사람이나 모임들의 연합’이자 동료애입니다. 차별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듯이 얼라이십도 고정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해지거나 완성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변화하는 상태인 것이죠. 학습과 탈(脫)학습의 고된 과정을 통해 얼라이십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인종 차별에 저항하고 인종적 평등을 구체화할 청사진을 함께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자신을 흑인, 유색인 (BIPOC: Black, Indigenous, Person of Color), 동아시아인으로 정체화하는 이들 사이의 얼라이십과 연대에 주목합니다. 저는 이와 유사한 종류의 얼라이십이 백인, 유럽인, 남미인과 그 외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은 이 글이 처음 염두에 두었던 독자는 아닙니다. 동아시아인과 아프리카계 디아스포라간의 얼라이십을 위해서는 동아시아인들이 인종차별적 인식을 탈(脫)학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혀있는 다소 방대한 일이므로 이 글에서 저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들의 특정 조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세 번째는, 특정 지역의 이슈를 글로벌 패턴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2020년 3월부터 8월 사이 뉴욕에서 서울로 이동하며 적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전 세계는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았고 동시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 진압에 반대하며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두 개의 대륙 사이를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인종’을 둘러싼 이슈들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인종차별이 장소-특정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서 물리적, 사회적 공간 내에서의 지위와 함께 민감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런던이나 서울에서 어떤 이가 느끼는 인종 갈등이 미시건 주의 플린트Flint나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서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처럼 말입니다. 차별의 경험은 만연하지만 불균일하며, 피부색, 젠더, 정체성, 민족성, 국적, 또는 식민주의의 흔적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관습에 따라 다릅니다. 동아시아인으로서, 또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지역적, 전지구적 공동체 내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2020년 3월경 코로나19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 나는 인종차별적인 말로 모욕적인 상황을 겪은 적이 몇 번 있다. 종이에 드로잉, 10x10cm, 2020.

미국 내 인종차별을 둘러싼 논의들은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함께 지난 몇 달간 매우 급격하게 변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사회 내의 여러 아시아계 공동체들은 이 사회 운동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가령 자신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세력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이들부터 상호 지원mutual support 풀뿌리 조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유학생들이나 미국 사회에 융화되는 과정 중에 있는 이민자 혹은 외국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들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공동체가 가진 관점에 따라 Black Lives Matter 운동에의 참여 여부나 지지 혹은 비난의 정도가 상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1989)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 식료품점 사장이 폭동으로부터 가게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흑인들에게 외칩니다. “I no white! I black! You, me, same!” 해당 장면5은 미국 내 동아시아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한편, 인종 갈등은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흑인 분장을 하여 논란이 된 것이나, 미군 주둔의 오랜 역사, 흑인이나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 백인이 우월하다는 사고 방식 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글 한편을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광범위한 시각들을 모두 그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의 공통된 이해에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현재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통해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거대한 변화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사회 정의 운동과 더불어 소외된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폭력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문은 고칠 수 있다. 불은 끌 수 있다. 빈 선반은 채울 수 있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못한다. 사진: 최태윤 (미국 브루클린 플랫부시, 2020년 7월 17일)

인종 차별을 탈(脫)학습하기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아마우드 알버리Ahmaud Arbery, 브레오나 테일러Breonna Taylor, 토니 맥대드Tony McDade, 션 리드Sean Reed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유사한 일을 겪었으며 이는 전지구적 역사의 일면일 뿐입니다. 그러한 폭력과 만연한 불평등은 사회의 기본 구조에 속해 있으며 이는 미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인종적인 불평등은 식민주의와 글로벌 착취 네트워크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복합적이고 거대한 문제이며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입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다양성과 포용성Diveristy and Inclusion 운동을 지지해왔으며 이를 미술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이야기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는 그러한 시각이 다소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으며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지기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공간이 약자들을 지지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그 곳으로 초대하는 일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 제 주변에서 이러한 문제가 가시화되는 사건들이 있었고 커뮤니티 멤버 중 한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만일 사적인 인간 관계에 있어 인종차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나요?” 저는 제 자신에게 이념과 실천의 거리에 대해서 먼저 묻지 않았던 점이 부끄러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편견이나, 인종차별적인 언어 사용, 행동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개인적으로 공격받았다고 여깁니다. 저 또한 이제오마 올루오의 책 『인종 토크: 내 안의 차별 의식을 들여다보는 17가지 질문』을 읽기 전까지 제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한 답변으로 향후 제가 일상 생활에서 반-인종차별Anti-racism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일곱 개의 가이드라인을 적어보았습니다.

  1. 목격자를 자청하며 약자를 지지하기: 저는 교실이나 길거리, 또는 제가 속한 조직 내에서 흑인이 타인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재현되거나 학대당할 때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어떠한 제스처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제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저는 자숙하고 사과할 것이며 저의 행동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비판을 지지하겠습니다.
  2. 소속된 조직 내에서 인종차별 반대를 요구하기: 저는 제가 가진 네트워크와 자원들을 활용하여 소속된 조직 내에서 인종차별 반대를 요구할 것입니다. 저는 교육 기관, 예술, 기술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 뿐 아니라 클라이언트나 협업을 진행하는 분들에게도 흑인이나 BIPOC 사람들이 변화를 가져오고 행동 강령 및 사명 선언문을 업데이트 할 수 있는 기관과 권한을 갖도록 리더십을 재구성하게끔 요청할 것입니다. 나아가 운영 및 커뮤니티 원칙에도 이를 명시적으로 표기할 것입니다.
  3. 흑인 소유의 기관이나 단체들을 지지하기: 인종적 평등을 제가 속한 조직 내에 가져오는 것만큼 기존에 인종차별 반대를 실천하며 흑인 공동체에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흑인 소유의 갤러리, 예술인 운영 학교, 기관들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재정적으로 이들을 지원함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들을 지원하고 함께 하도록 권장하겠습니다.
  4. 투명성을 통해 신뢰 쌓기: 저는 인종평등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조직들과 더불어 제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단체들을 돕겠습니다. 저는 재정적 측면과 평등을 위한 의사 결정 과정 모두에서 투명성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업무 과정을 공유하고 열린 태도로 일할 것이며 협업할 수 있는 분들을 초대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비판을 수용할 것입니다.
  5. 공로를 인정하기: 저는 출판에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준 모든 분들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크레딧에 표기할 것입니다. 만일 제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다시 편집해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또한 그 분들께 제 작업으로 인해 발생한 수익이 기회가 닿는 대로 나눠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6. 지역에서 활동하기: 저는 제가 인종차별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탐색하겠습니다. 가령 이러한 주제에 관해 한국어로 글을 쓴다거나 혹은 한국의 활동가들이 이러한 주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사를 조직하거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시적연산학교의 국제적 커뮤니티를 통해 원격으로, 또 체계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지속하겠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행동 없이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행동하겠습니다.
  7.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고민하기: 이 행동 리스트는 성명을 요청한 흑인 공동체 멤버들과 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원칙들은 고립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슈들과 교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노력을 제가 소속된 장소의 소외된 약자, 흑인 이외의 유색인, 장애인, 성소수자,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확장시켜나갈 것입니다. 제 행동은 구조적으로 존재가 부정당해온 이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깨어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특정한 때에만 하는 행동이 아니며 호의를 베풀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차별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저는 독자들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혹은 인간 관계 속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동들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그 방법을 적어보는 것이 얼라이십의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플랫부시에서 본 마스크들. 사진: 최태윤 (미국 브루클린 플랫부시, 2020년 7월 11일)

완벽하지 않은 얼라이십allyship에 관하여



2020년 6월 첫째 주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했을 때, 저는 한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매우 긴박하게 다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론이 두 가지 지점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의미론적semantics인 부분입니다. 언론은 평화로운 시위나 다양한 공동체들의 연대, 효율적인 상호 지원, 혹은 이 시위가 어떠한 사회 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백인 우월주의에 저항하는지 등이 아닌 무질서와 약탈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은 경찰의 치안 유지 활동이나 감옥-산업 단지Prison-industrial complex내에서의 인종적 편견의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Black Lives Matter 시위를 성급히 1992년 LA폭동과 연결 짓기도 했습니다. 활동가와 역사가들의 사이에서는 1992년 LA 한인 타운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1967년 디트로이트, 1968년 뉴욕 등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더불어 구조적인 폭력이 어떤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시각에 따라 ‘폭동riots’, ‘봉기uprising’ ‘반란rebellion’ 등의 용어 중 어떤 것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시민들과 경찰들이 승인되지 않은 기물 파손, 절도, 우발적인 폭력을 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폭력을 축소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폭동riots’이라고 부르는 것은 해당 운동을 단순화시키며 어느 한쪽 편에서만 이를 보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을 대상으로 행해지고 있는 구조적 차별의 복합적인 네트워크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승인한 폭력이나 희생, 게토화나 젠트리피케이션, 거주지 강제 철거나 인종 착취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현재도 진행 중인 흑인에 대한 폭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미디어나 구전을 통해 잘못 재현되어 온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과 달리 흑인들은 미국이 현재까지 번영하는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토대를 만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시위와 그 속에서의 폭력적인 현상들을 단순하게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역사적으로 흑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폭력의 전후 맥락을 함께 파악할 때, 우리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의 단편이 아니라 이들에게 고통을 가한 다년간의 사회적 질서에 대해 비평할 수 있으며 동시에 성숙한 상호 이해와 존중을 전제로 한 글로벌 연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미 있는 얼라이십은 일방통행일 수 없으며 그것은 흑인과 비 흑인 공동의 상호 의존과 상호 지지를 바탕으로 합니다.

두 번째는 오역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한국 언론들이 Black Lives Matter를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Black Lives also Matter)”로 번역했습니다. 이는 심각한 오역인데, 왜냐하면 ‘Also’를 사용함으로써 흑인의 삶의 가치를 다른 삶들의 맥락 속에 놓고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Black Lives Matter를 비 흑인의 경험 속에 위치시키는 하나의 예시입니다. 보다 문화적으로 섬세하게 번역한다면 “Black Lives Matter”를 다른 삶과의 비교 없이 독립적으로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라고 해야 합니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핵심 메시지는 흑인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으며, 그들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하고, 그들의 몸과 정신은 구조적 폭력은 물론 경찰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인들은 백인 우월주의와 공모함으로써 흑인에 대한 체계적인 폭력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조던 필Jordan Peele 감독의 영화 겟 아웃Get Out(2017)에는 흑인의 몸을 파는 입찰식 경매에 한 아시안 남성이 백인들과 함께 참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감독은 흑인의 몸을 사고 파는 이 장면을 먼 과거의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겟 아웃의 디스토피아 속에 있는 그 동아시아인 캐릭터는 진하게 드러나는 아시아인 억양으로 흑인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살아가기에 당신의 정체성은) 유리한가요 불리한가요? Is the African-American experience an advantage or disadvantage?” 경매를 통해 흑인의 몸을 구매할 의향이 있었던 그는 흑인 신체를 획득한 자신의 삶을 상상하며 이를 아시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에 비교해보지만 결국 백인들의 폭력 행위에 동참합니다 . 이러한 광경은 매우 익숙한데 가령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과 연루된 경찰관 토우 타오Tou Thao, 혹은 흑인 여성들만 성폭행했던 경찰 다니엘 홀츠클로Daniel Holtzclaw, 뉴욕에서 흑인을 숨지게 했던 경찰 피터 량Peter Liang 그 외에도 많은 아시아인들이 백인 우월주의 앞에서 침묵하거나 공모하는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거나 혹은 침묵하는 것은 구조적인 폭력과 소외 받는 이들의 생생한 경험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진정성있는 방식으로 공감하며 책임감을 가지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인종차별적인 사회 안에서 혜택을 받거나 책무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인은 삶 속에서 다양한 유형의 차별을 경험해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1850년 골드 러쉬 당시의 중국인 노동자들의 착취에 관한 것이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계 미국인을 억류했던 일과 같은 동아시아인들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이나 착취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와 더불어 동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우리는 미국 내 흑인에 비하면 인종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국 내 동아시아 이민자 청년들이 학교 가는 길에 검문 검색을 당할 확률은 흑인에 비해 낮습니다. 직장인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아시아인들은 직장 내에서 차별을 당할 수 있지만, 그 또한 흑인 동료가 그들의 커리어 상에서 토큰화tokenized 되었다고 느끼는 것보다는 덜 할 것입니다. 동아시아인들은 사회 속에서 미묘한 차별을 경험하거나 함께 어울리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겠지만 흑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생명의 위협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종적 특권의 경험들은 동아시아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백인과 가깝게 느끼게 하거나, 백인들의 영역에 가까이 가는데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학문적 명성을 얻거나 모두가 알 만큼 유명한 회사에 고용되는 것은 비(非)백인이 백인 우월주의의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이며 이처럼 잘 알려진 동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은 그들이 백인 중심의 가부장적인 계급 구조에 순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동아시아인들은 그들의 특권을 재생산하며 자녀들에게 백인 중심 구조에 가장 덜 저항하는 방향을 권합니다. 미국 내의 동아시아인들은 대부분 언어, 종교, (본국이나 미국에서 학맥을 통해 갖게 된) 사회 계층, 사업적 관계 등을 기반으로 밀도 있게 조직된 공동체 내에서 살아갑니다. 동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며, 지역 정치나 인종간, 타 문화 공동체와 연대에 관계 맺지 않을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아시아인을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묶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일은 타 인종 사람들이 아시아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며, 나아가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탈학습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너를 체념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급진적이게 만들기를. 친구가 진통제와 함께 보내준 글귀.

얼라이십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종적 평등을 위한 대화에서 탈(脫)중심화decentering하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들어야만 하는 목소리를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는 흑인들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흑인들도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점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술가, 큐레이터, 작가, 문화 생산자로서의 얼라이십은 과거 우리의 예술, 문화, 교육 기관에서 억압되거나 무시당했던 흑인들의 경험을 중심에 둠으로써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탈중심화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중심에 두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Black Lives Matter 시위에 보여주기식으로 참여하는 백인들에게서 흔히 이러한 문제 사례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적절하게 탈중심화 하려면 먼저 권력의 렌즈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의 위치를 파악한 후,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적 대인 관계를 섬세하고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저는 젊은 활동가나 사회 정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특히 오소리티 컬렉티브Authority Collective6, BUFU7, 옐로 재킷 콜랙티브Yellow Jackets Collective8, 프레스 프레스 볼티모어Press Press Baltimore9와 같은 LGBTQ 커뮤니티 내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흑인의 삶을 위한 편지Letter for Black Lives10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에 도전하며,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얼라이십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인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 내리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미국 및 전 세계 다른 주요 도시들과 함께 뉴욕, LA의 예술가, 활동가, 주최자, 가게 주인들은 경찰의 만행과 체계적인 폭력에 반대 시위를 하고 흑인들과 관련 단체들을 지지하며 자원의 재분배를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스키드 로 피플스 마켓Skid Row People’s Market11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곳은 한국인 이민 1세가 20여년간 운영 후 2세들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세대 교체와 함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켓의 현 운영자들은 이민자의 역할을 기성 세대들과 다르게 생각하며 이윤을 남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미션을 가지고 실천적 비즈니스를 지속합니다. 전쟁과 경찰의 만행, 노예제, 교도소 시스템이나 젠트리피케이션, 거주지 강제 철거, 그리고 인종 자본주의와 같은 문제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복잡한 정치 사회 시스템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에 퀴어 블랙 페미니즘 실천이 행해왔듯이) 백인 남성의 이권을 중심으로 작동되어온 현 체제에 균열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백인이 아니라면 당신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인종차별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인종적 평등을 위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당신이 인종, 젠더, 사회 계층 혹은 다른 요인들로 인해 받았던 차별의 경험을 다시 중심에 놓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이 자신을 의미있는 방식으로 탈중심화한다면 당신은 고통스럽고도 천천히 지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당신은 항상 비판 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변화는 대체로 고통스러우며 느리지만 이는 필요한 일이며 아름답습니다. 그레이스 리 보그스Grace Lee-Boggs는 “우리가 삶에서 변화를 보기를 원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If we want to see change in our lives, we have to change things ourselves.”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변화할 때입니다. 아마 그것이 불완전한 얼라이십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Black Lives Matter”와 무지개 현수막이 걸려있는 서울의 미국 대사관 앞을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20년 7월 14일)

한국의 지역적 맥락에 맞추어


가상의 Q&A

Q “저는 평등의 원칙이나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단일 민족 국가인 한국에 살고 있어서 제 가까이 살고 있는 흑인이나 아프리카 사람을 한 명도 알지 못합니다. 만일 제가 물리적으로 흑인들을 만나거나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어떻게 그들과 얼라이십을 맺거나 함께 할 수 있을까요?"

A “네, 맞습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국가에는 아주 소수의 흑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질문자께서 적극적으로 보다 다양한 커뮤니티에 속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을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도 다양한 흑인 커뮤니티가 존재합니다.

한국의 대중 문화 속에서 예를 들자면 케이팝K-pop이나 엔터테인먼트, 패션 등에서도 흑인 문화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흑인 문화를 전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질문자께서는 케이팝이나 길거리 패션에서 어떤 방식으로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지 의미 있는 논의를 해보실 수도 있고, 혹은 종사하시는 분야에서 국내외에 있는 흑인들과 협업을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여행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등 미디어를 통해 지리적 한계를 넘어선 시도들을 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피부색에 따라 누군가를 차별하는 일에 맞서는 것은 국내에 다수 거주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이주민들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얀 피부에 집착하며 피부가 검게 타는 것을 희화화 하는 것 등은 피부색 차별주의, 즉 컬러리즘Colorism의 한 증상입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흑인을 비롯하여 피부색이 어두운 외국인에 대해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이러한 행동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안티-블랙니스Anti-blackness 에 저항하는 것은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Q “제가 얼라이십을 실천 하려면 무엇을 해야하죠?"

A "얼라이십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인종,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인종적 평등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친구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인종차별주의나 백인 우월주의를 발견하기도 하고 흑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나 공감 능력이 결여된 부분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친인척이나 지역 사회 내에서 비판적으로 대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 의식, 특권, 공모에 대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해야 했을 때, 그리고 제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행동의 부재에 의해 마지못해 계속해서 가지고 있으면서 퍼뜨렸던 인종차별적 인식이나 편견에 대해 인정해야 했을 때, 뼛속 깊이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서 저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얼라이십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한국에 있는 예술 기관들은 무엇을 해야하나요?”

A “미국과 유럽의 기관들이 흑인 예술가, 작가, 큐레이터들을 토큰화tokenization하여 형식적으로만 내세운 것을 따라하지 마십시오. 다양성과 포용성이라는 레토릭에 빠지지 마십시오. 예술 기관들이 다양성과 포용성을 내세우면서 특정한 타입의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 일어납니다. 제프 창Jeff Chang은 저서 We Gon’ Be Alright에서 “다양성은 다른 인종들이 계속해서 백인을 위해서 공연하게 요구함으로써 백인들이 자신들을 지우게끔 만든다. Diversity allows whites to remove themselves while requiring the Other to continue performing for them.”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법을 배우고 디트로이트 사회 정의 활동가 에이드리엔 마리 브라운Adrienne Maree Brown이 그녀의 책 Emergent Strategy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뢰의 속도로 움직이십시오. Move at the speed of trust.” 나의 친구이자 협업자인 제롬 헤르만Jerrom Herman은 2019년 휘트니미술관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There are many ways to raise a fist”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살았던 브루클린 플랫부시Flatbush 지역의 한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흑인들의 삶이 중요하다면, 모든 삶이 중요하다. If Black Lives Matter, All Lives Matter”라고 말입니다."

나와 친구 오토, 사진: 김종희 (미국 브루클린 플랫부시, 7월 26일 2020)

글 최태윤 Taeyoon Choi

아티스트. 서울과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시적연산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를 공동 설립했으며, 이곳에서 세션을 조직하거나 전자 공학, 드로잉,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강연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2020년에는 서울에 위치한 팩토리2에서 개인전 자신을 돌봄 : 일기와 편지를 발표했다. https://taeyoonchoi.com

편집 이레티올루 아킨리나데 Iretiolu Akinrinade

시카고 태생의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으로 최근 심리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흑인-페미니스트 분석틀을 중심으로 기술과 사회에 대해 다루는 일들을 진행하고 있다.

번역 정유진 Yujin Jeong

영어통번역과 미술이론을 공부했으며 공적 영역에서 시각 예술이 가진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에듀케이터로 재직 중이다.


  1. 이제오마 올루오, 『인종 토크: 내 안의 차별의식을 들여다보는 17가지 질문』, 서울: 도서출판 책과 함께, 2019, 271쪽. 

  2. Allyship. 얼라이십, 알리십 등으로 발음하며 Ally와 함께 최근 몇 년간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함께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사회적 약자와 ‘연대’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나 주로 ‘연대’로 번역되는 Solidarity와 구분하는 동시에 allyship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와 맥락을 포괄하기 위해 발음 그대로 번역하였다. Allyship은 각 사회 구성원들이 정체성의 측면에서 각기 다른 부분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연대한다는 의미가 있다. 필자는 이에 관해 설명하며, 남성이 페미니즘 운동과 ally 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3. https://sfpc.io/ 

  4. https://ashleyjanelewis.com/ 

  5. https://www.youtube.com/watch?v=9sFY92tbcmU 

  6. https://authoritycollective.org/ 

  7. http://www.bufubyusforus.com/ 

  8. https://www.instagram.com/yellowjacketscollective/?hl=en 

  9. https://presspress.info/ 

  10. https://lettersforblacklives.com/%EC%82%AC%EB%9E%91%ED%95%98%EB%8A%94-%EA%B0%80%EC%A1%B1%EC%97%90%EA%B2%8C-22777f621da9 

  11. https://www.goodfoodla.org/announcements/2019/2/6/skid-row-peoples-market